▲ 범여권 신당문제와 17대 총선 구도와 관련, 노 무현 대통령은 두 가지 정도의 시나리오를 갖 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8 월11일 청와대에서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 고 있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 같은 질문에 대해 현재 정치권에서 확실한 답변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친노파’로 꼽히는 여권의 한 핵심인사조차 “노 대통령 본인도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모르는 것 아니냐”고 말할 정도다.
그러나 국정운영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총선과 정국 운영 구상이 없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정치권에서는 노 대통령의 최근 발언들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대통령의 정국 구상과 관련, 두 가지 정도의 시나리오가 제시되고 있다.
첫째는 향후 ‘전형적인 미국식 대통령제’ 방식으로 정국을 운영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공무원들과의 온라인 대화에서 “일단은 전형적인 미국식 대통령제로 운영하는 게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라종일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와 관련, “미국 대통령제하에서는 여야 정당의 개념이 없고 다수와 소수파 개념이 있는 것”이라며 “따라서 노 대통령의 이날 언급은 여야 정당을 구분하지 않고 정책을 중심으로 범정파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뜻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입장은 대통령 당선 이후 수차례 밝혀온 프랑스식 대통령제 도입 약속을 스스로 뒤집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 대통령이 이날 대화에서 “지난번 국회 연설에서 지역구도가 극복되면 프랑스처럼 국회에서 추천하는 사람을 국무총리로 임명, 이원집정 형태로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정치권은 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다”고 해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야당은 즉각 노 대통령의 발언을 ‘약속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노 대통령이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구상을 밝힌 것은 취임 초 예상과 달리 정국 상황이 전개되기 때문이라는 게 이 시나리오의 분석이다.
시나리오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취임 초 자신에 대한 높은 지지도와 정치개혁 및 지역구도 타파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맞물려 개혁신당이 성공적으로 출범하고 이어 17대 총선에서도 선전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 노 대통령이 당선 축하를 위한 당원 연수에서 “총선 후 제1당에게 총리지명권을 넘겨주겠다”고 공언한 것도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분발을 촉구하는 의미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지지도가 급락하고 ‘호남소외론’ 등을 바탕으로 한 구주류의 반발로 신당 논의가 8개월째 지지부진하자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고 결국 ‘범여권 총선 참패’라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사전포석용으로 여야를 구분하지 않는 미국식 대통령제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8월25일 공무원과의 온라인 대화에서 ‘미국식 대통령제’의 도입 필요성을 언급했다. | ||
노 대통령이 지난달 23일 총선 출마를 위해 사직한 청와대 참모진 7명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신당이 잘 됐으면 했는데 그동안 쭉 지켜보니 잘 안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노 대통령이 총선 이후 단수의 개혁세력 연합신당이나 복수의 개혁신당들과 일종의 연립정부 형태로 정국을 운영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여전히 개혁신당이 출범하기를 기대하고 있고 또 개혁신당과 남은 임기를 함께할 의지를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
노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지역구도에 변화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4년을 더 해봤자 별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을 이 같은 의지의 표현으로 보고 있다. 노 대통령이 간혹 핵심 측근들과의 비공식 면담에서 “10~20명만 돼도 지역구도를 타파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등의 발언을 한 것도 마찬가지다.
총선 출마를 선언한 청와대 참모진들의 입장도 노 대통령의 개혁세력 연대구상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해성 전 홍보수석 등은 지난달 23일 출마시 당적 문제에 대해 “같은 당에 들어가 행동을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느슨한 ‘신념의 연대’를 갖고 있다”며 “행보를 반드시 같이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앞서 이 전 수석은 21일 “민주당이 통합신당 형태로 정리되면서 개혁적인 사람들도 함께하는 게 가장 좋지만 형편이 쉽지 않아 보인다”며 “따라서 필요하면 개혁을 준비하는 사람들끼리 정치 결사를 만들 수도 있는데 그 형태야 결국 정당이 되지 않겠나”고 말했다.
특히 이 전 수석은 “출마하는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 ‘노심’을 안고 나가는 것으로, 대통령의 생각을 잘 아는 사람들이 나가서 대통령 철학을 의회에서 구현하려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여 이 같은 생각이 노 대통령의 구상임을 시사했다.
그럼 노 대통령은 이 같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왜 범여권 신당문제에 ‘불개입’ 의지를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등 힘을 실어주지 않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민주당 강경파와 온건파는 다소 다른 분석을 내놓고 있다.
즉 노 대통령 자신이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새 정치를 향한 기대로 극적 반전을 이뤄냈던 것처럼 개혁신당 역시 총선을 앞두고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라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영·호남 지역정서 등으로 개혁신당 세력이 단일대오를 형성하지 못할 경우에도 다수의 개혁신당들이 각개 약진을 통해 국회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뒤 정당 연합을 이루면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다.
반면 신주류 온건파의 한 인사는 “노 대통령이 자신의 신당문제 개입이 개혁신당 세력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침묵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인사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내년 총선이 ‘지역주의 타파 등 정치개혁 세력’ 대 ‘기득권 유지 세력’ 대결로 전개돼야 개혁신당 세력에게 유리한데 자신이 개입할 경우 ‘친노 여권’ 대 ‘반노·비노 정당’ 구도로 전개돼 지역주의가 부활하는 등 오히려 한나라당에게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총선에 출마하는 청와대 참모진들에게 “선거는 큰 구도가 어떻게 짜여지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전제한 뒤 “대통령이 선거에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보이면 그것이 결국 손해 보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시나리오는 모두 노 대통령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여야나 개혁 혹은 보수세력들과 원활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사실상 범여권 세력이 내년 총선에서 패배해 한나라당이 다시 과반수를 점하는 구도를 전제하고 있는데 이 경우 노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야당에 내어줄 가능성이 높다. 여권은 분열되고 국정원, 검찰 등 전통적인 권력기반마저 독립성을 확보한 상태인 만큼 국민적 지지도마저 회복하지 못할 경우 심각한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범개혁 세력의 총선 승리를 전제하고 있는데 이 역시 현재의 총선구도나 여권 지지도 등을 감안하면 장담하기 어려운 전제다.
이에 따라 정치권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할 세력이 내년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올 연말이나 내년 초에 ‘특단의 구상’을 내놓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원집정부제 또는 내각제 개헌 추진’ 등을 포함, 총선의 화두 자체를 바꿈으로써 자신이 밝힌 대로 선거의 구도를 바꾸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는 관측 등이 이런 맥락에서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