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은 피들이 대거 약진한 이번 LG 인사를 두고 구본무 회장이 향후 후계구도를 염두에 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돌고 있다. | ||
지난 12월 23일 서울 여의도 LG그룹 본사에서 열린 2008년 4분기(10월~12월) LG전자 ‘노경협의회’가 결렬돼 재계의 관심을 끌었다. 1989년 대규모 파업사태 이후로 LG전자는 줄곧 무분규 임금단체협상(임단협) 타결을 해왔다. 노동자과 사용자라는 ‘노사(勞使)’ 대신 노동자과 경영자라는 ‘노경(勞經)’이라는 단어를 처음 도입하는 등 노동조합과 회사 간의 두터운 신뢰관계를 과시해온 터라 ‘협상 결렬’이란 표현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1월 12일 LG전자 노경협의회는 지난해 성과급 명목으로 월 기본급의 300%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급하기로 합의하면서 갈등국면을 봉합했다. 그러나 지난 2001년 아시아·태평양 노사관계 전문가들이 쓴 저서에 모범사례로 소개됐을 정도로 돈독했던 LG전자 ‘노경관계’에 경색국면이 연출된 점은 재계의 큰 관심거리였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남용 LG전자 대표이사 부회장(61)과 전임이었던 김쌍수 한국전력공사 사장(64)을 비교하는 시선도 생겨났다. 공장장 출신으로 LG전자 내 현장을 두루 거쳐 대표이사 부회장에 올랐던 김쌍수 전 부회장에 비해 비서실·구조조정본부 등 본사에서 잔뼈가 굵은 남 부회장이 현장 노동자들을 아우르는 능력에서 떨어진다는 비판론이 제기되는 것이다.
▲ 남용 부회장, 강유식 부회장, 조준호 부사장 | ||
최근 남 부회장을 향한 시선은 그룹 내 ‘젊은 피’들의 약진과 맞물려 묘한 해석을 낳기도 한다. 지난 12월 19일 LG그룹은 40대 후반~50대 초반 인사들을 대거 경영 전면에 내세우는 임원 인사를 단행했다. 이 중 가장 눈여겨 볼 인물은 올해 50세가 된 조준호 ㈜LG 경영총괄 부사장이다. 조 부사장은 이번 인사를 통해 구본무 회장, 강유식 ㈜LG 부회장(61)과 더불어 지주회사인 ㈜LG 공동 대표이사를 맡게 됐다. 당초 사장 승진도 검토됐으나 기존 사장단에 비해 너무 젊다는 평가 때문에 승진은 미뤄졌다고 한다. 사장급도 아닌 조 부사장에게 지주사 대표이사를 맡겼을 만큼 구본무 회장의 신뢰가 남다르다는 전언이다.
재계 인사들은 조 부사장의 약진이 LG그룹 2인자로 불려온 강유식 ㈜LG 부회장을 위시한 그룹 내 노신그룹의 향후 입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한다. 조 부사장은 ‘포스트 강유식’으로 평가받아온 그룹 내 대표적인 기획통으로 지난 2002년 최연소 부사장 승진을 기록했으며 조만간 최연소 사장 승진 기록을 세울 이로 꼽힌다. 강유식 부회장의 잠재적 후계자감으로 여겨지던 조 부사장이 파격 인사를 통해 어느덧 강 부회장과 ‘투톱체제’로 지주사를 총괄하게 됐으니 구 회장 의중이 어디로 쏠리는가를 엿볼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동안 ㈜LG와 LG전자의 대표이사 자리는 총수일가 일원도 쉽게 넘보기 힘든 구 회장 최측근 몫으로 여겨져 왔다. 강유식 남용 부회장 등도 50대 후반에나 입성했던 요직을 50세 되는 해에 꿰찬 조 부사장의 성장세로 그룹 내 권력지형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LG전자의 신진세력 전진배치도 주의 깊게 볼 대목이다. 홈엔터테인먼트사업본부장인 강신익 부사장(55)과 모바일커뮤니케이션사업본부장인 안승권 부사장(52)이 이번 인사에서 사장으로 승진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지난 2007년 당시 크게 부진했던 해당 사업본부를 맡아 높은 실적을 내면서 조준호 부사장과 더불어 그룹의 차세대 리더로 주목받게 됐다. 젊은 인사들의 약진은 구본무 회장의 대대적인 세대교체 구상을 예상케 하는 대목이다. 그동안 그룹을 주도해온 노신그룹을 2선으로 물리고 신진세력을 끌어올리는 물갈이 작업 수순으로 풀이되는 것이다.
입양 전까지 1%에도 미치지 못했던 구광모 씨의 ㈜LG 지분율은 현재 4.58%에 이르렀다. 구광모 씨가 지주사 지분율을 늘리는 동안 구씨 가문의 일부 방계 인사들의 지분율이 줄어들자 가문 차원의 힘 실어주기란 해석이 등장했다. ㈜LG에서 구광모 씨는 구본무 회장(10.51%)과 숙부 구본준 LG상사 부회장(7.58%), 그리고 자신의 생부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5.01%)에 이은 4대 주주에 올라 경영권 승계 주체가 될 것이란 관측을 낳고 있다.
그러나 구광모 씨는 아직 30대 초반에 불과한 데다 학업도 마치지 않은 상태다. 경영일선을 누벼온 구 회장 동생들의 벽도 아직은 높아 보인다. 이런 까닭에 구 회장의 후계 구상은 장기적 안목에서 진행될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다.
LG는 지난 2000년 직급 간소화의 일환으로 폐지했던 전무 직급을 이번 인사에 재도입, 젊은 상무급 인사들을 대거 승진시켰다. 일각에선 이번 전무 승진 인사를 훗날의 대대적인 물갈이를 위한 전초작업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이런저런 논란을 낳고 있는 60대 부회장 그룹과 조준호 부사장을 필두로 한 신진세력 간의 경쟁구도가 구 회장의 후계구상과 맞물려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에 재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