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에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박원순 제압’ 문건이 발견돼 파장이 일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진선미 의원이 해당 문건 내용을 입수한 것은 지난 4월 중순, 익명의 우편물을 통해서였다. 진 의원 측이 해당 문건을 국가정보원에서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문건과 함께 우편물에 딸려 온 메모. 이 메모에는 “원세훈 원장이 당시 국익전략실장(B 실장, 신○○)에게 지시하여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원세훈이 조직 차원에서 정치개입 행위를 지시했음을 명백히 밝혀주는 자료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진선미 의원은 기자회견 당시 “국익전략실이라는 것이 2011년 당시 국정원에 실제 존재했고, 메모 속에 등장한 B 실장 역시 실제 국정원 직원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두 번째는 문건의 형식과 사용된 표기 등이 실제 국정원 문건과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해당 문건은 시작 부분에 작성일자로 보이는 ‘2011.11.24(2-1)’, 마지막장 하단에는 ‘0-0’, ‘2-0’, ‘3-0’에 배포했다며 일반 문서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 숫자들이 등장한다. 진 의원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결과, 각각 국정원장(0-0), 국정원 2차장(2-0), 국정원 3차장(3-0)일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작성일자와 함께 표시된 ‘2-1’은 국정원 제2차장 산하에서 작성된 표시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해당 문건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정을 좌편향됐다고 보고 향후 정치개입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어 실제 국정원 문건으로 확인될 경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문건 서두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 이후 무상급식 확대·시립대 등록금 대폭 인하 등 좌편향·독선적 시정운영을 통해 민심을 오도, 국정 안정을 저해함은 물론 야세 확산의 기반을 제공하고 있어 면밀한 제어방안 강구’를 작성 목적으로 밝히고 있기도 하다.
문건에 지목된 박 시장의 좌편향 실태를 살펴보면 △2009년 하이서울페스티발 행사를 방해한 시위대 8명에 대한 손해배상금 징수 포기 △2011년 ‘희망서울정책자문위’를 발족한 뒤 각종 비공식 자문위를 신설하고 ‘4대강 사업’과 ‘한미 FTA’ 반대를 선동한 반정부 인물 다수 기용 △민주당 서울시의원들의 요청에 따라 서울광장 조례 무효소송 취하 추진 △복지 확대 명분 토지개발 사업예산 대폭 축소 등이었다. 이 과정에서 “종북좌파 인물들의 깊숙한 시정 개입으로 좌편향 정책 남발은 물론 국가적 현안사업 발목잡기 및 공직사회 좌파 이념 오염 등 후유증이 우려된다”는 지적도 등장한다.
국정원에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박원순 죽이기’ 문건.
구체적 전략으로는 △감사원과 행안부 감사를 통해 각종 부조리 적출 및 시정 촉구 △저명 교수와 논객들을 동원, 언론 사설 칼럼을 통해 시정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기획, 시리즈로 쟁점화 △자유청년·어버이연합 등 범 보수진영 대상 박 시장의 시정을 규탄하는 집회 항의 방문 및 성명전에 적극 나서도록 독려 등으로 나타나 있다.
이 때문에 민주당에서는 국정원과 보수단체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변호사 출신의 한 민주당 의원은 “국정감사 때마다 국정원 특수활동비가 보수단체로 유입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오곤 하는데 매번 확인이 잘 안 되더라”며 “국정원 특수활동비는 8000억 원이 넘는데도 국회조차 사용처를 알 수가 없게 돼 있다”고 전했다. 반면 뉴라이트 계열 시민단체 관계자는 “문건이 실제 국정원에서 작성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치공세가 심하다”며 “설사 국정원에서 작성했다 하더라도 박원순 시장이 편향된 시정을 펼치고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이야기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이미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에서 보다 광범위하게 판을 벌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민주당에서 문건 수사를 촉구하고 나섰고, 문건 속에는 “검·경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불거진 병역 면탈, 자녀 서울대 법대 전과 등 자질 도덕성 문제를 끝까지 추적해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며 검찰마저 거론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 관계자는 “이번 국정원 추정 문건과 원세훈 수사는 별개”라며 “수사 진행 중인 사안에 관해 알려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전했다.
이번에 폭로된 문건에 관해 국정원 대변인실은 “해당 문건에 관해 진위 여부를 파악 중이고 시일이 좀 걸릴 것 같다는 말씀만 드릴 수 있다”고 밝혔다. 한 국정원 직원은 “나도 보도를 보고 알았다. 오래전이라 전산 기록이 없고 문건이 여러 차례 복사를 거친 것이어서 쉽게 검증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 같더라”며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마무리하고 새롭게 시작하려는데 안타깝다”고 전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네…
서울시 국정감사에 출석해 위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는 박원순 시장. 박은숙 기자
당시 재판은 원고가 ‘대한민국’으로 되면서 국가가 개인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할 수 있는 것인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결국 지난해 4월 대법원은 “국가가 국민의 비판에 소송으로 대응하려 할 경우 표현의 자유가 위축되고, 언로가 봉쇄될 우려가 있다”며 원고 패소를 확정했다. 이 소송은 박 시장이 서울시장 출마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정원이 박원순 시장을 정치권으로 불렀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번 국정원 추정 문건과 관련해 서울시는 자체적으로 조사에 나설 것이라고 밝혀 당분간 관계 개선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이게 다 ‘지역갈등’ 탓?
내부에서는 이 같은 원인으로 국정원 특유의 지역갈등을 꼽기도 한다. 지난 2월 초 한 팀장급 직원은 사석에서 “김대중 정부 때는 호남 인사가 원을 장악하고, 이명박 정부 때는 TK(대구·경북) 지역에서 대거 등용되고, 정권 바뀔 때마다 우리만 죽어나는 상황”이라고 한탄했다. 실제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을 민주당에 제보했던 전·현직 국정원 직원들이 모두 호남 출신이라고 알려지기도 했다.
남재준 국정원장을 맞은 국정원에서는 최근 육사 출신이 대거 유입되면서 뒷말이 나오기도 했다. 지난 4월, 국정원 조직개편 당시 남 원장은 자신의 국방보좌관으로 육사 37기인 고 아무개 대령을 임명했다. 국방보좌관은 통상 소장이나 준장이 맡아 왔고, 대령이 뽑힌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군 소식에 정통한 한 인사는 “지난 정부 막바지에 임명된 뒤 3개월째 일하고 있던 준장을 군으로 돌려보내고 군복을 벗을 처지인 대령을 기용한 것”이라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남 원장은 국정원 3차장으로, 오랜 측근인 김규석 전 육군본부 지휘통신 참모부장을 기용했고, 육군참모총장 시절 비서실에 있던 예비역 대령(육사 38기) 역시 국정원에 입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내부에서는 신임 원장으로서 조직개편 때 자기 사람을 한두 명 쓴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이 없고, 상하 간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군인 신분이던 이들이 국정원 특수 업무를 맡을 자격이 있는지 좀 더 따져 봤어야 했다는 평가도 있다. 한 예비역 장교는 “국정원은 각종 정보수집 활동과 청와대 동향보고를 통해 사실상 군 인사 문제에 관여할 수 있다. 국정원에 들어간 인사들이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를 탈락시키거나 밀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