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임시국회의 핫 이슈는 추가경정예산안이었다. 실제 4월 국회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경제 회생용 추경을 통과시키기 위해 연 것이었다. 여야 간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정부가 요청한 금액에서 5000억 원만 깎일 정도로 추경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그런데 추경안을 다루던 국회 기획재정위에서 한은법 개정안이 수면 위로 떠오르더니 추경안은 뒤로 밀리고 이에 대한 논쟁으로 시간을 보냈다. 한국은행은 외환위기 때인 지난 1998년 12월 29일 금융개혁법안 통과와 함께 금융회사에 대한 조사권을 내놓았다. 한국은행 총재가 과거 재정경제원 장관이 맡던 금융통화위원장 자리를 가져오는 대신 각종 금융회사에 대한 감독권을 당시 신설된 금융감독원에 넘겼다. 한마디로 독립성을 확보하는 대가로 금융회사에 대한 영향력을 내놓은 셈이었다.
이후 한국은행에 금융회사 조사권을 부여하기 위한 시도가 몇 차례 있었지만 초기단계에서 논의가 중단됐다. 그러던 것이 이번 국회에서 논의되나 싶더니 예상을 뒤엎고 4월 21일 국회 기획재정위 소위를 통과하면서 핫 이슈가 됐다.
이번에 소위를 통과한 한은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한국은행 설립목적에 금융안정 기능을 추가하는 한편 금융기관 직접 조사권을 현행 136개에서 526개 기관으로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기획재정위 소속 여야 의원들이 공동으로 한은법 개정안을 주도했다. 여기에 기획재정위원장을 맡고 있는 서병수 한나라당 의원도 한은법 개정안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동안 번번이 무산됐던 한은법 개정안이 이번 국회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된 이유에 대해 금융권과 정치권은 기획재정위 소속 의원들의 불만(?)을 첫 번째로 꼽고 있다. 국회에는 18개의 상임위원회가 있다. 각각의 상임위는 산하 정부부처나 기관과 관련한 예산이나 법률 등을 다룬다. 이 가운데 기획재정위는 정부부처 중 기획재정부와 국세청 관세청 등을, 관련기관으로는 한국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 등을 두고 있다. 돈과 관련한 대부분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정무위원회에 금융감독원과 금융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등 각종 감독권한을 가진 부처가 배정돼 있다. 이 배분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주장이다.
기획재정부는 이명박 정부 출범 전까지 금융정책국을 거느리고 있었다. 금융기관들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막강해 재정부 내에서도 힘이 센 곳이었고, 엘리트 코스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금융정책 권한을 분산하면서 이 금융정책국을 금융위원회에 떼어줬다. 따라서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권한을 가진 부처는 모두 정무위로 넘어가버렸다. 기획재정위 소속 의원들로서는 금융기관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에 따른 불만이 이번 한은법 개정안 파동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실제 18대 국회 들어 기획재정위가 소위에서 8번, 전체회의에서 4번, 총 12번에 걸쳐 논의한 법안은 한은법 개정안이 유일할 정도로 기획재정위 소속 의원들에게는 최고 현안이었다.
또 다른 정치권 인사도 “상임위 소속 의원들의 영향력은 산하기관의 영향력과 비례할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 들어 갑자기 금융기관 조사권이 모두 정무위 소속 기관들에 넘어가면서 기획재정위가 힘이 빠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다”면서 “금융기관 관계자들이 한은법 개정안이 소위에서 논의될 때 당연히 부결될 것으로 보고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였다. 소위에서 한은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나서야 금융계 인사들이 부랴부랴 국회로 뛰어갔다”고 말했다.
금융업계의 한 관계자도 “한국은행에 조사권을 주려고 하는 것은 오랫동안 논의됐지만 통과된 적이 없어 대부분의 금융회사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4월 21일 한은법 개정안이 기획재정위 소위를 통과했다는 뉴스가 나오면서 비상이 걸렸다”면서 “상당수 은행 관계자들이 국회로 뛰어가 기획재정위 소속 의원들, 특히 재정부 출신 의원들을 만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국회 기획재정위 측은 이런 관측을 부인한다. “금융위기를 겪지 않기 위해 한국은행에도 조사권을 주려 했던 것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기획재정위 소속 한 의원실 관계자는 “기획재정위 의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한국은행에 권한을 주려고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금융위기를 효과적으로 이겨내기 위해 조사권을 부여하고자 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무위 소속 의원들이 여야 할 것 없이 기획재정위의 한은법 개정안 통과 노력에 반발한 것은 이번 한은법 파동의 ‘배경’이 따로 있음을 반증한다. 한은법 개정안이 기획재정위 소위를 통과하자 정무위는 여야 국회의원 만장일치로 법 개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정무위 산하에 있는 금융위원회의 힘이 빠지는데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기획재정위 소속 의원들은 한은법 개정안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한은법 개정안 처리를 9월 정기 국회로 미뤘고, 윤증현 재정부 장관을 압박한 끝에 정기국회 개회 전까지 절충안을 마련, 거시경제보고서와 함께 제출하는 조건을 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논의 과정이나 정무위의 반대 등을 보면 실제 한은법 개정안 통과는 무산된 것이나 다름없다. 9월 정기국회에서 처리될 가능성은 거의 제로”라면서 “그럼에도 기획재정위에서 이런 조건을 단 것은 앞으로 금융기관들의 행보를 지켜보겠다는 경고 메시지인 셈”이라고 해석했다.
이준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