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16명이 CJ그룹의 후원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간 이후 여의도 정가에선 ‘리스트’를 확보하려는 은밀하고도 신속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요즘 정치권 정보통들은 CJ그룹에서 후원받은 정치인 명단을 확보하기 위해 은밀하지만 매우 바삐 움직이고 있다. MBC가 검찰과 CJ 측 관계자 말을 인용해 ‘TK(대구·경북) 지역 정치인 13명, 민주당 정치인 3명을 후원했다’는 보도를 하면서부터다.
대기업이 정치인을 후원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지만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정치권에 정경유착 의혹을 제기할 수 있어 대형 이슈로 번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대기업의 후원을 받으면서 대기업을 옥죌 수 있겠느냐는 의문은 분명히 뉴스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출처가 불분명하지만, 정치권에서는 TK 지역 정치인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기도 하다. 대구에 몇 명, 경북에 몇 명 식의 얘기도 돌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도 있다. 정치권 한 인사는 “지역과 숫자가 거론된 것이 어느 정도 사실일 가능성을 보여준다”며 “TK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배출한 일등공신 지역으로서 CJ로선 실세 지역에 줄을 댔을 가능성이 크다”고 평했다. 보통 뜬소문은 추상적인데 이번 보도는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 보도가 나가자 관련 국회의원실은 해당 매체에 “우리 의원도 포함돼 있습니까”라는 문의전화를 계속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의원 보좌진들에 따르면 대기업의 후원은 미리 의원실에 알리고 의원실의 재가 하에 이뤄진다. 아니면 누가 왜 보냈는지 알 수 없고, 보내는 측에서도 생색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문의는 ‘도둑이 제 발 저리기 때문 아니겠느냐’는 의혹으로도 번지고 있다.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는 일부 정치인은 후원금을 받은 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름이 거론된 한 의원실 관계자는 “18대 국회 때 청목회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권이 각성했고, CJ 측에서 한 번도 후원하겠다고 밝혀온 적이 없기 때문에 후원받은 사실이 없다고 자신한다”며 “하지만 후원금 통장 내역을 다시 샅샅이 살피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정치권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과 달리 의외로 검찰에서는 후원금 부분을 ‘곁가지’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수사 프로세스로 봤을 때 아직 정치권까지 건드릴 시간적 여력은 없어 보인다. 언론이 너무 앞서가는 듯하다”고 말했다. 재계 한 정보통도 “후원금 쪼개기가 불법적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대가성을 입증하기 쉽지 않은 데다 탈세 등 다른 큰 줄기들이 있어서 검찰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처럼 CJ 비자금 수사가 정치권, 특히 여당 지역으로 번지자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 중 박근혜 정부가 여야 할 것 없이 정치권 손보기에 나서면서 향후 국정 운영을 청와대 위주로 하려는 ‘기선 제압용’으로 보는 시각이 가장 많다. 일부 의원의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정부에 반기를 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취지를 각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29일 검찰이 서울 장충동 이재현 CJ그룹 회장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CJ 수사에 대한 또 다른 정치적 배경도 다시 회자된다. 바로 전임 이명박 정부 관련성이다. CJ 비자금 의혹은 이미 지난 2008년 이재현 회장의 개인 자금을 관리해온 이 아무개 씨가 살인청부 혐의로 재판받는 과정에서 불거진 일이다. 당시 CJ그룹과 이재현 회장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벌인 국세청은 이재현 회장에게 4000억 원대 차명재산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며 비자금 의혹을 가졌다. 검찰은 그동안 내사도 진행해왔음을 시사했다. 그럼에도 새삼 5년이나 지나 정권이 바뀐 후 본격적으로, 마치 정권이 바뀌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정·재계에서는 CJ와 이명박 정부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던 것 아니냐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특히 이재현 회장이 이명박 정부 인사의 핵심 축인 고려대 출신인 점에서 정부 실세들과 가깝게 지내 그간 검찰이 움직이지 못했던 것 아니냐는 얘기다.
이명박 정부에서 이 회장과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진 인물로는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곽승준 전 미래기획위원장, 박영준 전 국무총리실 국무차장 등이 꼽힌다. 특히 이명박 정부의 ‘교육 3인방’ 중 한 명인 곽 전 위원장의 경우 이 회장과 대학 동창인 데다 집안끼리 왕래가 있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로서 지난해에는 ‘룸살롱 접대 의혹’도 받은 바 있다. 재계 고위 인사는 “천 회장, 곽 전 위원장, 박 전 차장과 막역한 사이라는데 선뜻 손볼 수는 없었을 것”이라며 “정권이 바뀌자 검찰도 비교적 자유로워진 것이며 TK 지역 정치인 로비 의혹이 일어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또 하나. 하고 많은 대기업 중 왜 CJ냐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삼성이나 현대 등 수출기업과 달리 CJ는 유통과 문화 등 내수 산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대(對)국민 비리’라는 측면에서 폭발성이 큰 것으로 본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CJ는 특히 유통 쪽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에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현 정권이 타깃으로 삼기에 구미가 당기는 대기업”이라고 말했다.
정세판단에 능한 정치권 인사도 “수출에 주력하는 대기업은 어쩔 수 없이 정치권의 크고 작은 지원을 필요로 하고, 정치권도 대기업의 수출을 도우면서 한국의 대외 경쟁력과 역량 강화에 일조한다는 측면에서는 서로 어느 정도 견제와 공조가 필요하다고 이해되는 측면이 있지만, CJ는 국내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사업을 확장해 더 큰 돈을 벌어들이는 기업이라는 측면이 다르다”고도 했다. CJ 측이 정치권을 움직여 서민의 쌈짓돈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거나, CJ 측이 숨겨둔 비자금에서 정치 후원금을 꺼냈다면 국민적 질타가 극에 달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지난 정부 정리’라는 계산도 있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앞서 말한 대로 CJ는 지난 정부 실세들과 연결돼 있는 탓에 파다 보면 자연스레 지난 정부의 과오 등을 정리할 수 있다는 것. 앞의 재계 관계자는 “CJ 비자금 수사가 검찰의 4대강 담합 의혹 수사와 연결된다면 이명박 정부가 정리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선우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