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 회장.
검찰의 CJ 비자금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것으로 보이는 알파벳 C는 대부분 CJ그룹 핵심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C1, C2, C3…’의 순서로 나아간다. C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다양하게 유추해볼 수 있다. 최고경영자(CEO)를 의미하기도 하고, 회장(Chairman)을 가리키기도 하며, CJ의 C를 따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이야 어떻든, 알려진 바로는 ‘C1’은 이재현 회장을 가리키며 ‘C2’는 이 회장의 누나인 이미경 부회장을, ‘C3’는 이 회장의 어머니이자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부인인 손복남 CJ그룹 고문을 가리킨다고 한다.
비밀에 싸여 있던 알파벳 C의 베일이 서서히 벗겨지고 있는 것과 때를 같이해 ‘C3’, 즉 손복남 고문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손 고문이 CJ그룹의 막후실력자라는 얘기가 흘러나오면서 CJ그룹의 탄생과 성장, 비자금 조성 의혹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알파벳 C로 인해 검찰 수사가 속도를 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이에 대해 CJ그룹 관계자는 “특정 부서에서 쓰는지는 모르겠으나 공식적으로 쓰는 표현은 아니다”라며 “공식적으로 ‘이재현님’이라고 한다”고 반박했다.
CJ그룹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이 5월 29일 서울 장충동에 위치한 이재현 회장 자택을 압수수색한 뒤 떠나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CJ그룹처럼 회장을 영문 이니셜 등으로 간단히 표현하는 대기업이 적지 않다. 임직원들이 서로 대화할 때 쓰는 것뿐 아니라 공식·비공식 문서에 오너 회장의 이름과 직함 대신 영문 이니셜이나 암호를 쓰고 있는 것. 재계 1위 삼성도 이건희 회장을 가리켜 영문 이니셜 ‘A’로 지칭한 적이 있다. 삼성그룹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에는 옛 삼성 구조조정본부에서는 공식 문서에도 이건희 회장을 영문 대문자 A로 표시했다고 나와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그룹 내에서 Chairman(회장)의 약자인 ‘CM’으로 통하고 있다. 다른 기업에 비해 한화그룹 임직원들은 CM이라는 용어를 외부에서도 종종 사용한다. 최태원 SK(주) 회장은 그룹 내부에서 ‘T’로 지칭된다. 최 회장은 ‘TOP’ 혹은 ‘TC’(영문 이름 Taewon Choi 약자)로 불리기도 한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본인의 이름 영문 이니셜을 따 ‘MK’라고 불린다.
왼쪽부터 김승연 회장, 최태원 회장.
기업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내부 문서 등에는 그룹 회장을 지칭하는 특정 용어나 영문 이니셜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주로 해당 기업들의 사법처리 과정에서 밝혀지고 있다. 다시 말해 비공식적으로 사용하고 표현하던 것이 검찰 수사, 압수수색, 재판 등의 과정에서 공개되는 것.
더욱이 이 같은 영문 이니셜과 암호명은 검찰 수사와 재판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영문 이니셜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파악되면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기가 꽤 용이해지는 것이다. 최태원 회장의 비자금 수사와 재판이 그러했고, 김승연 회장의 배임 혐의를 입증하는 과정이 그러했으며, 이번 CJ 비자금 수사 역시 그러할 것으로 전망된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뭔가 켕기는 구석이라도…
이름은 쏙 뺀 채 ‘회장님’이라고만 지칭하기도 모호하다. 요즘은 오너 회장뿐 아니라 각 계열사에도 회장이 여럿 있는 기업이 적지 않다. 재계 관계자는 “오너 회장과 계열사 회장을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영문 이니셜을 즐겨 쓴다”며 “오너 회장을 ‘스페셜 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다른 재계 관계자는 “기업에서 오너 일가는 극존칭 대상”이라며 “대화할 때뿐 아니라 보고서마다 극존칭을 쓰기는 어려우며 그럼에도 굳이 쓴다면 보고서가 우스워질 수 있다”며 영문 이니셜을 쓰는 이유를 설명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해당 기업들이 이를 극구 부인하는 까닭은 기업과 회장에 좋지 않은 이미지를 내비치기 때문이다. 영문 이니셜이 주로 기업 내부 문서와 내부 직원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것이기에 밖으로 알려질 경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을 우려가 짙다. 앞의 대기업 고위 인사는 “비자금 조성이나 계열사 지원 등을 추진할 때 보고서 등에 회장의 이름과 직함을 정확히 지칭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