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4월 15일 항소심 선고 공판을 받기 위해 구급차를 타고 서울고등법원으로 들어가는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계열사들이 출자한 펀드 투자의 선지급금 465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구속된 상태에서 현재 2심 재판을 받고 있다. 본인은 물론 연루 인사들까지 진술을 번복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오는 9월로 예상되는 항소심 선고에서도 무죄를 입증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재계와 법조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도 계열사를 부당지원해 회사와 소액주주들에게 손실을 끼친 혐의 등으로 구속돼 영어의 신세다. 1심에서 징역 4년과 벌금 51억 원, 2심에선 징역 3년과 벌금 50억 원을 선고 받았다. 현재 대법원의 최종판결을 남겨놓고 있다. 두 회장의 혐의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하지만 여론에 비춰보면 똑같이 ‘부도덕한 대기업 총수’ 사건들일 뿐이다. 정상 참작의 여지가 적다는 얘기다.
SK그룹의 한 관계자는 “최 회장에 대한 재판이 썩 유리하게 진행되는 것 같지 않아 걱정이 많은데 CJ 비자금 사건 등이 터진 뒤 여론이 우리와 한화 문제를 같이 거론해 최악의 상황”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여론이 대기업 회장들에게 우호적이지는 않더라도 기업 경영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식의 정서적 반응이 있어야 재판에서 기대를 걸어볼 만한데 일련의 흐름을 보면 기대와는 전혀 반대로 가고 있다”고 한탄했다.
한화그룹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시 직접적인 ‘기업 사정’의 영향권에 들어있다. 국세청이 지난 5월 말 한화생명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에 착수한 것이다. 한화그룹은 국내 그룹 가운데 조세피난처 내 자산규모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고, <뉴스타파>는 지난 5월 27일 황용득 한화역사 사장의 역외 탈세 의혹을 폭로하며 그룹 차원의 비자금 조성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한화생명은 한화그룹의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세무조사를 통해 한화그룹 전반의 자금 운영 흐름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만큼 돌출적인 사안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화그룹 측은 “5년마다 이뤄지는 정기조사라는 점을 알리고 있지만 밖에선 그렇게 보지 않으려 한다”면서 “요즘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어서 초여름 같지가 않다”고 하소연했다.
두 그룹은 모두 ‘총수 없는 경영체제’를 실험 중이다. SK는 지난해 말부터 ‘수펙스(SUPEX)추구협의회’라는 집단지도체제를 가동하고 있다. 계열사별 자율경영 체제가 특징. 김창근 SK이노베이션 회장이 의장을 맡아 현안을 결정하는 각 위원회의 조정 역할을 하고 있다. 지휘나 명령 없이 계열사 이사회 의견을 존중해 중복투자 방지 등의 조율만 한다. 한화그룹은 지난 4월에야 뒤늦게 ‘비상경영위원회’를 신설했다. 한화 입사 46년차인 ‘최고참’ 김연배 한화투자증권 부회장이 위원장을 맡는 등 이른바 ‘원로 리더십’에 의지하고 있다.
하지만 두 그룹은 경영안정화만도 버거운지 계열사들의 대규모 투자와 신규 사업 계획 수립 등은 차질을 빚고 있다. SK그룹의 경우 각 계열사들의 실적 부진이 우려되는 가운데, 신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인수한 SK하이닉스는 지난해 4분기 극적으로 흑자전환을 이뤄냈지만 상승탄력을 붙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해외 사업도 쉽지 않아 보인다. 태국, 터키 등에서의 사업들에서 진척이 이뤄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한화그룹도 사정이 비슷하다. 김 회장이 진두지휘하며 고비를 넘겨왔던 80억 달러(약 9조 원) 규모의 이라크 신도시 건설 사업은 진행 과정이 순조롭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발전소, 정유시설, 병원 등 추가 수주 논의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그동안 신성장동력으로 추진해온 태양광 사업도 최고결정권자가 공백인 사이 태양광전지 원료인 폴리실리콘 가격이 폭락하고 주요 수요처인 유럽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관련 계열사들의 실적이 부진하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이번 여름, 두 그룹 총수의 재판 결과에 따라 부재 상태가 장기화될 경우가 정말 문제”라며 “대안적인 경영체제로 각종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주력분야에 대한 집중과 선택이 이뤄져야 하는데도 수세적인 경영으로 일관할 경우 그룹 전체의 실적이 저조해지는 위험상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웅채 언론인
아파도 아프다고 말도 못하고…
최태원 SK(주) 회장
실제 최 회장은 4개월이 넘는 수감생활로 인해 허리 상태가 악화된 것으로 전해졌다. 디스크 판정을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허리를 숙이거나 정좌 자세가 힘든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고충이 알려지는 것 자체가 동정론보다는 부정적 여론을 확산시킬 가능성이 높다. 같은 처지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비교돼 부정적 상승효과까지 우려된다.
김 회장은 재판 당시 병원 침대에 누운 채로 재판정에 출석하는 모습을 보인 데다, 최근 당뇨와 호흡곤란 증세 등으로 2차로 형집행정지가 결정돼 현재 서울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최 회장까지 “나도 아프다”고 할 경우, “대기업 총수들은 감옥에만 가면 형 집행정지를 노리고 꾀병을 부린다”고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 게 빤한 것이다.
사실 한화그룹 관계자들은 김 회장이 형 집행정지를 받는 과정에서 ‘꾀병설’로 속앓이를 많이 했다. 외부에 “김 회장이 정말 아프다”고 설명하고 다녀야 했다. 김 회장이 2차 구속집행정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판사가 직접 주치의를 불러 소견을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아프다고 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는 김 회장이나,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최 회장이나 결국 가중처벌을 받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