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권 각 시·도당이 ‘공약가계부’ 사태로 지역 의원들의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하고 있다. 사진은 2011년 이명박 정부에서 신공항 백지화를 선언할 당시 영남권 의원들의 심각한 모습이다. 일요신문 DB
박근혜 정부가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대한 예산을 줄이고, 신규 사업도 최대한 억제해 복지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공약가계부’를 발표하면서 국회 의원회관, 그것도 적잖은 새누리당 의원실이 일촉즉발 분위기다. 논공행상과 거리가 멀었던 그간의 각종 인사 문제에 침묵하면서 “일단 지켜보자”던 관망 분위기는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역민심”이라는 절박함으로 바뀌는 모습이다.
특히 이들 사업의 예산 축소는 지난 19대 총선에서 지역 발전 프로젝트 공약을 내건 당 소속 의원들의 약속을 무참히 짓밟는 것으로 알려져 “국민과의 약속은 꼭 지켜져야 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은 결국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냐”는 불만의 목소리로 나타나고 있다. 공약가계부가 이행되면 박 대통령이 대선 때 약속했던 지방공약이 ‘없던 일’이 될 공산이 크고, 새누리당 소속 지방자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들도 다가오는 재·보궐 선거나 내년 지방선거는 물론 다음 총선에서까지 지역민에게 외면당할 가능성까지 거론된다는 것이다.
신공항 건설을 염원하는 영남권, 수서발 KTX 노선의 의정부 연장이나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에 제동이 걸린 수도권에서는 특히 “이런 꼴을 당하려고 표 준 것 아니다”라는 반발 여론이 거세다.
“박 대통령의 공약가계부는 결국 자신의 대선 슬로건으로 내건 ‘복지, 일자리, 경제민주화’ 중 ‘복지’부터 약속을 지켜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지방경제 발목잡기를 담보한 자신의 약속 이행을 정치권이 가만히 앉아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란 이야기가 파다하다. 이제는 ‘박 대 당의 전면전’만 남았다.”
정세판단에 능한 한 정치권 인사는 이같이 진단하면서 “내 약속은 중요하고 네 약속은 중요치 않다”고 읽히는 박 대통령의 에고이즘(자기중심주의)을 꼬집었고, “복지 확대의 악순환을 경고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경고했다.
지역 여론은 거의 ‘발악’ 수준이다. 혁신도시, 자유경제구역, 산업단지공단 등이 전국 각 지역에서 느릿느릿 진행되고 있고, 대기업은 수도권에 밀집해 지역 인재까지 빨아들이는 상황에서 지역으로선 SOC 사업만이 경제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복지 공약에 ‘올인’하면서 “지역의 속사정을 무시했다”는 분노는 새누리당의 텃밭인 영남권에서 더욱 급속히 피어오르는 분위기다.
한 영남권 당협위원장은 “영남권의 각 시·도당이 이번 ‘공약가계부 사태’를 이유로 지역 의원들의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하고 있다”며 “외유 중인 의원들이 많아 6월 초에야 모임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래도 그 이후에는 뭔가 결집한 모습을 보여줄 가능성이 크다”고 귀띔했다.
PK(부산·경남) 쪽에서는 “대선 보은을 이런 식으로 하느냐”는 여론이 비등해지고 있다. 진주의료원 폐업,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가동 중단, 밀양 송전탑 건설 등이 최근에 터지면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데, 가덕도로 올 가능성이 큰 신공항 추진에도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야성(野性)’을 되찾아야 한다는 분위기로 전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부산 출신인 문재인 민주당 전 대선 후보(현 국회의원)가 조금씩 자기 목소리를 내며 정치활동을 재개하고, 같은 부산 출신인 안철수 무소속 의원이 신당 창당을 전제로 한 인재영입에 나서 PK발 악재가 야권 우호 분위기로 갈아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 정보기관 관계자의 분석을 들어보자.
“지난 원내대표 경선에서 TK 출신인 친박 핵심 최경환 의원 조가 8표 차로 경남의 이주영 조를 이겼을 때, TK 이외 지역 의원들 사이에서 ‘계속 TK 당으로 남을 것이냐’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박 대통령 고향이 대구라서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나 이제는 박 대통령에 대해 필요한 견제는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드세질 가능성이 높다.”
앞서 말한 전면전 분위기의 전초기지는 PK가 될 것이란 이야기였다. 이 관계자는 또 “이번 공약가계부로 인해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의 성공보다는 자신의 역사적 평가를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도 했다. 역대 정권이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소속 정당의 탈당 요구나 거리두기가 이뤄진 정치권의 생리를 누구보다 박 대통령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새누리당이 본격적인 ‘박근혜 색깔빼기’에 돌입하기 전에 당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그래서 ‘박심’에 가장 가까운 인물들을 새 정부의 정비가 끝난 직후 당에 심어놓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는 새누리당 내부에서 최경환 원내대표, 홍문종 사무총장, 김재원 전략기획본부장 등을 두고 박 대통령이 당에 심어 놓은 ‘트로이의 목마’가 아니냐는 의구심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박근혜 정부의 공약가계부 구상이 최 원내대표 선출 직후 곧바로 터져 나왔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 ‘최·홍·김 체제’가 당의 반발을 잠재우면서 정부의 복지 구상을 원내에서 실현하는 당-청 가교세력이며, 당의 이야기를 청와대에 전달하기보다는 청와대의 의중을 당에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번 공약가계부 정국은 최 원내대표로서는 일종의 시험무대가 될 전망이다. 최 원내대표는 원내대표 경선에서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는 친정체제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냐는 각종 우려의 목소리에 “신뢰관계가 있어야만 쓴소리도 할 수 있다”면서 ‘생산적 쓴소리’를 자임한 바 있다.
만약 이번 사태에서 최 원내대표가 청와대의 의중만 당에 전달하는 역할을 할 경우 결집하고 있는 초·재선 의원들 사이에서 ‘최경환 힘 빼기’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강력한 원내지도부는 고사하고 당장 6월 국회에서부터 각종 사안에 여당 소속 의원의 딴죽 식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우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