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대한민국 개조’ 추진은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향으로 분석된다. 사진제공=청와대
하지만 이날 합의는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빠진 것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들은 협약 체결식장에 나와 “방하남 퇴진”, “한국노총 각성하라” 등의 구호를 외쳐댔다. 민주노총은 이번 협약이 “비정규직과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을 외면하는 나쁜 일자리 협약”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사실상 장내 시위를 벌인 탓에 협약 당사자들의 질의·응답은 차질을 빚었고 결국 서둘러 끝나고 말았다.
<장면#2> 이보다 앞선 5월 27일 오전 국회.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진땀을 뺐다. 박근혜 정부 공약 이행을 위해 5년간 필요한 135조 원의 재원 대책이 담긴 ‘공약가계부’에 대해 새누리당 지도부를 상대로 설명하기 위해 찾아왔다가 말 그대로 ‘뭇매’를 맞은 것이다.
정부는 지난해 대통령선거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제시한 105개 지방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80조 원 정도의 재원이 필요한 것으로 추계했었는데, 공약가계부에는 그 4분의 1 수준인 20조 원 수준만 반영됐기 때문이다. 기존에 진행돼 온 사회간접자본(SOC) 건설 사업을 계속 진행하기 위한 예산만 확보해 놨을 뿐 신규 사업에 대한 예산은 가계부에 반영하지 않은 것이다.
새누리당 인사들은 박 대통령의 주요 공약이었던 동남권 신공항 건설,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 건설, 수서발 KTX 노선의 의정부까지 연장 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며 현 부총리를 몰아세웠다. 한 최고위원은 “지방의 신규 SOC 사업은 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건 내년 지방선거를 치르지 말자는 얘기와 다를 게 없다”며 목소리를 높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두 장면은 이제 기획을 넘어 실행 단계로 접어든 박 대통령의 대표 공약 및 주요 정책들의 향후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선거 과정에서 국민들 앞에 약속한 사항은 반드시 지키겠다는 박 대통령의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실제 집행까지는 만만찮은 반발과 갈등, 그로 인한 혼란이 뒤따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실제로 두 장면 모두 역대 정권 초기에 나타났던 야당 등 반대세력의 ‘정권 길들이기’ 시도와는 거리가 멀다. 반발이 야권뿐 아니라 여권에서도 전면적이고 공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100일도 지나지 않아서, 더욱이 여당인 새누리당 지도부가 대부분 친박근혜(친박)계로 채워진 상황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보다 ‘박근혜 스타일’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박 대통령의 대표 공약들과 주요 국정 과제들은 대한민국의 경제·사회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개혁을 지향하고 있는 까닭에서다. 다시 말해 박 대통령이 일종의 ‘대한민국 개조’를 지향하고 있는 만큼 필연적으로 고통스럽고 시끄러운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이 근본적인 대한민국 개조를 지향하는 것 못지않게 향후 정책 집행 과정에서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개혁 과제가 중장기적으로 성과가 발현되는, 다시 말해 하루아침에 성과가 날 수 없는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김대중 정부가 추진했던 IT 산업 육성, 카드사 등 금융산업 육성 등은 상대적으로 빨리 과실을 따먹을 수 있는 정책 과제들이었다. 또한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비롯한 토건사업 역시 중장기적인 평가는 차치하더라도 즉각적인 정책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친박계의 한 의원은 “이전 정부가 흔히 써먹었던 토목공사나 국책사업 등이 너무 많은 폐해를 낳는 바람에 새 정부로서도 마땅히 쓸 수 있는 단기 처방책이 없는 게 사실”이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박 대통령이 이런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것을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향으로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시골 주택 개량사업으로 시작한 새마을운동이나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화학공업 육성 등 박 전 대통령의 치적들은 당시로서는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엄청난 혁신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박 대통령 역시 당장은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미래에 먹고살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박 대통령의 창조경제론, 경제민주화론에 대해 비판적인 인사들조차 “뜻은 좋다”는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여권 내에서조차 “뜻만 좋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다”는 우려 섞인 반응이 나오는 상황이다. 이 같은 반응의 배경에는 박 대통령과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처한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실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요 경제정책을 추진할 당시에는 사실상 ‘종신 대통령’이었다. 야당이 있었지만 반대세력의 힘은 극히 미약했고, 그에 반해 정부 시책에 부응해 과실을 따먹으려는 기업들은 줄을 서 있었던 상황이다.
반면 박 대통령은 5년 단임 대통령에 불과하다. 1년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당장 여당 내부에서부터 이탈이 시작될 수 있다. 역대 정부가 3년차를 지나면서부터 사실상 레임덕을 겪었던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게다가 박 대통령의 발목을 잡을 반대세력은 아버지 시절에 비하면 너무도 강해져 있다. 지난해 대선에서의 분패를 기억하고 있는 야당과 진보적 시민사회가 전세를 만회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데다 전통적 우군이었던 대기업 등 경제계 역시 경제민주화의 직격탄을 맞을까 우려하며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자칫 적당히 비위만 맞추며 정부 시책에 협조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면 이 같은 환경적 제약을 직시하고 이에 걸맞은 전략·전술을 구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대세력과 소통하면서 타협하거나, 민심을 등에 업고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그야말로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험대에 올랐다는 얘기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