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콜 독일 전 총리(맨 왼쪽)는 카메라 앞에서만 다정한 전형적인 ‘배우형’ 아버지에 해당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유년 시절에 이런 다짐을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아버지가 됐을 때 자신이 얼마나 아버지와 닮아 있는지를 알고 놀라는 사람들 또한 많을 것이다. 먼 옛날 아버지가 했던 그 표정, 그 몸짓, 그 말투로 자녀들을 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아마 ‘내 안의 아버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모든 아버지의 모습에는 그의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최근 독일 시사주간 <슈테른>은 ‘남자, 그리고 아버지!’라는 기사에서 ‘모든 아버지들은 자녀들의 성격에 유산을 남긴다’라고 말했다. 또 이렇게 물려받은 성격은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따라서 이런 성격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좋은 아버지가 되는 첫걸음이라고 했다. 이렇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면 아들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됐을 때 아버지 역할이 보다 쉬워지며, 딸의 경우에는 훗날 어떤 남자가 배우자로서 좋고 나쁜지 쉽게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녀들의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늘 어머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새로운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아버지 역시 어머니 못지않게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인생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 아버지는 누구이며, 또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일까?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어떤 점을 물려받았을까? 오늘날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슈테른>이 살펴본 여섯 가지 아버지 유형을 통해 과연 내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으며, 또 나는 현재 어떤 아버지인지 살펴보자.
# 독재자형
이런 유형의 아버지들은 대개 육아에 무관심하다. 동서를 막론하고 전통적인 아버지의 역할이 바로 이랬다. 아버지는 부양만 책임지면 된다고 생각하며, 자녀와 관련된 모든 일은 아내에게 위임한다. 가족 모두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사실상 집안에서의 주인은 바로 아버지다.
<슈테른>은 이런 독재자 유형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을 들었다. 엄격하고 냉엄했으며, 때로는 가혹하기까지 했던 만은 자녀들에게 웬만해선 곁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 때문에 자신의 시간이 방해를 받는다며 불평하곤 했으며, 이렇게 무서운 아버지 때문에 특히 아들들의 경우에는 잔뜩 억눌려 살아야 했다.
일례로 막내아들이었던 미하엘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선물받은 장난감을 실수로 망가뜨린 후 위로를 받기는커녕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냐?”라며 꾸중을 들어야 했다. 또한 장남 클라우스는 아버지의 단편소설 <무질서와 어린 시절의 고뇌>에서 ‘패배자’라고 불리는 수치를 감내해야 했다. 이렇게 차가운 남편을 그의 아내가 ‘괴물’이라고 불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하지만 아무리 아버지가 이렇게 차갑다고 해도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애정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인 지미 헨드릭스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어린 시절 술독에 빠져 지냈던 아버지에게서 맞고 자랐던 헨드릭스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는커녕 훗날 록스타가 된 후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노랫말로 표현했다. “당신이 존재하는 한, 나는 아무래도 좋아요. 당신은 나의 사랑스런 아버지니까.” 이 가사에 대해 심리학자인 볼프강 한텔-퀸트만은 “좋은 아버지라는 점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사랑받는 아이라는 점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 부재형
“아빠는 오늘 늦으신다.”
대표적 ‘독재자형’인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과 그의 가족(위). 아버지 없이 자란 마릴린 먼로와 그의 전 남편 아서 밀러.
이렇게 비어있는 아버지의 자리를 보면서 자랄 경우 상처를 받는 것은 딸보다는 아들인 경우가 많다. 비단 저녁 식탁뿐만이 아니라 부모가 이혼할 경우 이런 상처는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호르스트 페트리 정신과 전문의는 “아이들은 외로움을 느끼는 한편,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동경하게 된다. 실망하거나 불안해하거나, 혹은 절망감에 빠지기도 한다.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슬픔은 영원히 극복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딸들의 경우에는 아버지 없이 자랄 경우 남자 보는 눈을 잃게 될 확률이 크다. 프랑스의 심리분석학자인 크리스티앙 올리비에는 아버지 없이 자란 딸들은 어른이 돼서 열등의식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남자를 찾아 헤매게 될 수도 있다.
“나는 사랑받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란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는 딸들을 묘사할 때 주로 인용되는 말이다. 마릴린 먼로의 경우가 바로 대표적인 예다. 아버지 없이 양부모, 보호시설, 친구 집을 전전하며 자랐던 먼로에게 아버지의 빈자리는 죽을 때까지 극복되지 않았던 깊은 상처였다. 전문가들은 그녀가 평생 술, 담배, 우울증에 빠져 지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고 말한다.
연애 상대나 결혼 상대를 고를 때 늘 아버지의 모습을 찾곤 했던 먼로가 1956년 10세 연상의 극작가 아서 밀러를 결혼 상대로 선택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존경할 수 있는 남자를 원했던 먼로는 ‘지적인 극작가와 백치미 여배우의 만남’이라는 비아냥을 뒤로 하고 결혼에 골인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 내내 열등감을 느꼈던 먼로는 결국 4년 7개월 만에 다시 이혼 도장을 찍고 말았다.
# 배우형
아버지란 역할을 종종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연기하는 유형이다. 이런 유형의 아버지는 대개 자녀들에 대한 애정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일례로 50년대 배우였던 구스타프 크누스의 일화는 애정 없는 아버지의 존재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각인되어 있는지 잘 나타내고 있다. 어느 날 크누스의 가족이 키우는 고양이가 차에 치여 죽었다. 크누스의 아내는 아이들에게 이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얘들아, 카티(고양이의 애칭)가 죽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별 관심이 없다는 듯 계속 놀이에 열중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 딸아이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엄마, 카티는 어디 있어요?” 크누스의 아내는 “아까 말했잖니. 카티는 죽었어”라고 다시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그제야 울음을 터트리면서 “아까는 파티(아빠의 애칭)가 죽었다고 했잖아요!”라고 슬퍼했다.
‘겉치레 아빠’라고도 불리는 이런 유형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헬무트 콜 독일 전 총리다. 그에게 있어 아버지란 신분은 또 하나의 맡은 배역에 불과했다. 카메라 앞에서는 한없이 다정한 아버지였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못했던 것. 대외적으로는 가족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했던 그는 기자들 앞에서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고 운이 좋은 사람인지를 떠벌리곤 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아이들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가령 매년 오스트리아 볼프강 호수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보내는 것으로 유명했던 콜은 늘 기자들 앞에서 다정한 가족사진을 찍었고, 이런 사진을 본 독일인들은 감동을 받곤 했다. 한번은 기자들에게 “물론 아이들을 떼어내고 편히 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아이들을 데리고 숲속으로 산책을 나가는 걸 좋아해요. 단풍나무는 어떻게 생겼는지, 떡갈나무는 또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해준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에 대해 아들 발터는 훗날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휴가 기간 동안에도 35개의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매일 같이 총리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단풍나무와 떡갈나무는 아버지의 관심 밖이었다.” 또한 발터는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엑스트라 배우처럼 느껴졌는지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 강요형
미국 테니스 스타 안드레 아가시의 아버지는 ‘강요형’에 해당한다.
미국의 테니스 스타 안드레 아가시의 경우,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았던 아메리칸 드림을 실천해 보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아르메니아-이란계 이민자였던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최대한 빨리 미국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심했고, 결국 아들을 테니스 선수로 키우기로 작정했다. 이에 대해 아가시는 한 인터뷰에서 “우리집 분위기는 어려서부터 내가 경기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따라 달라졌어요. 이기면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했고, 지면 각자 따로 먹곤 했죠. 아버지에게 진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가시는 이런 상황을 즐겼다. 아들은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며, 이런 아들을 아버지는 매우 사랑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지나친 애정이 부담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아가시는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나를 조금만 덜 사랑해줬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었다”라며 씁쓸해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게 사랑이긴 한 걸까? 이에 대해 프랑크푸르트의 안드레아 밤베이와 한스-발터 굼빙어 사회학자는 “이런 유형의 아버지에게 자녀들이란 나이 먹어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필요한 존재로 여겨진다”라고 말했다.
# 대안형
진짜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역할을 잘해내는 유형이다. 이런 유형은 삼촌일 수도 있고, 학교 선생님일 수도 있고, 친구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또 새아버지일 수도 있다. 많은 남자들이 친아버지보다 더 아이들과 신뢰 관계를 구축하면서 아버지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페루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경우에는 할아버지와 삼촌에게서 아버지의 정을 느끼면서 자랐다. 글을 쓰는 것을 못 마땅해 하면서 폭력을 휘둘렀던 아버지와 달리 할아버지와 삼촌은 늘 그의 글을 칭찬해줬고 격려해줬다.
실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아버지를 대체해줄 사람을 찾아 헤맨다. 독일의 배우인 마를렌 디트리히의 경우도 그랬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던 그녀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갈구했다. 비록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오랜 세월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헤밍웨이를 가리켜 ‘파파’라고 불렀다.
# 파트너형
10세 때 아버지를 여읜 독일 배우 마를렌 디트리히(오른쪽)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갈구했다.
독일의 배우인 니나 호스는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운 좋은 여성이었다. 늘 약자 편에 서서 자유롭게 살았던 아버지를 보고 자랐던 그녀는 현재 독일 영화계에서 자신감에 차있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는 내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열정을 다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과 불굴의 의지도 물려주셨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연구 결과 이렇게 아버지에게서 칭찬을 받고 자란 딸들은 훗날 긍정적이 될 확률이 높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성공하는 경우도 많다. 자비네 발페르 독일청소년협회장은 “딸을 강인한 여성으로 키우는 것은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대개 딸들의 첫 번째 연애 대상이 된다.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받는 인정과 신뢰는 딸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다. 아버지를 통해서 자신의 여성성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니 훗날 배우자를 고를 때에도 아버지가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요즘 젊은 아버지들 사이에서는 ‘파트너형’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스스로 엄마와 동등한 입장에서 기꺼이 육아를 담당하고자 하며, 아이들과 가능한 밀착된 유대관계를 가지려 노력한다. 하지만 사실 이렇게 좋은 아버지가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늦은 밤까지 아이들과 놀다가 잠까지 재우기란 웬만한 체력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다음 날 일찍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버지들은 매순간 일, 아내, 자녀들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워킹맘들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이들과의 유대감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 이는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어려움이다. 심리학자들이 이 땅의 아버지들에게 전하는 충고가 어쩌면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완벽한 아버지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좋은 아버지면 그걸로 충분하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무엇이든 함께 해보세요
▲ 어른이 된 후에는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무언가를 함께 해보세요. 함께 여행을 간다거나, 요리를 한다거나, 또는 둘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는 뭔가를 찾아서 같이 해보세요.
▲ 아버지와 어떻게 대화를 나눌까요?
먼저 아버지가 좋아하는 주제로 말을 걸어보세요. 가령 축구, 돈, 정치 등이 있겠죠.
▲ 왜 아버지는 아직도 저를 화나게 하는 걸까요?
아직도 아버지 눈에는 종종 아들이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때문에 당신이 나서서 아들에게 세상을 가르쳐줘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당신이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그게 옳은 일이었지만 당신이 어른이 된 후에는 부딪칠 수밖에 없지요.
▲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생기는 대표적 오해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물질적이거나 혹은 경제적인 것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감정 역시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