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0년부터 매년 국방부가 국회에 대통령 전용헬기 교체를 위한 예산을 신청했지만 전액 삭감돼왔다. 올해도 국회 통과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사진은 지난해 12월27일 당선자 시절 전용헬기(VH-60P)를 이용해 강원도 인제 군부대를 방문하는 노무현 대통령. | ||
청와대측은 “전용헬기가 이미 수명이 다돼가기 때문에 서둘러 새로운 헬기를 구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야당은 “아직 헬기의 기령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고 이미 2대의 군용헬기를 개조해 사용하고 있으므로 굳이 새 것을 구입할 필요가 있느냐”며 청와대측을 ‘달래고’ 있다. 국회 거부로 4년째 헬기구입을 못하고 있는 청와대는 올해만은 기필코 예산을 확보해 새 것을 구입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대통령 전용헬기 구입을 둘러싼 청-야의 대립현장을 취재했다.
대통령 전용헬기 구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배경은 지난 99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통령 전용 헬기였던 AS-332L1(일명 슈퍼 푸마:지난 88년 말 2대, 89년 초 1대가 각각 도입됨)이 경기도 용인에서 착륙 훈련 중 동체가 파손되는 사고를 당했던 것.
전용헬기의 ‘추락’을 경험한 청와대 경호실과 운영주체인 공군은 화들짝 놀랐다. 청와대측은 전용헬기가 노후했다고 판단하고 이때부터 새 헬기 구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IMF의 칼바람이 채 가시지도 않았던 어려운 경제 상황 등을 고려해 다용도 헬기인 VH-60P 헬기를 개조해 쓰는 것으로 결정했다. 기종 명 마지막의 P는 대통령(President)의 이니셜을 딴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VH-60P 헬기도 지난 99년 8월15일 김 대통령이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했을 때 문제를 일으켰다. 행사 후 엔진이 고장나는 바람에 김 대통령이 승용차로 귀경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 그 뒤 두 차례의 ‘사고’를 경험한 경호실의 강력한 요구로 김 대통령은 새 전용헬기 도입을 허락했다고 전해진다.
그 결과 국방부는 지난 2000년 정기국회 때 2001년도 예산안 반영분 중 대통령 전용헬기 구입과 관련한 착수금 92억원을 국회에 신청했다. 그리고 청와대와 협의를 거친 공군은 헬기 구입 총 예산 1천2백75억원도 함께 신청했다. 하지만 국회는 이 예산 전액을 삭감해버렸다. 당시 여야 의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나라가 어려운 상황인 만큼 대통령이 솔선수범을 보일 필요가 있다”며 전액 삭감에 동의했다.
또한 이인기 한나라당 의원의 경우 “대통령 경호실과 공군이 헬기 교체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단순사고를 기체결함에 의한 중대사고로 호도했다”며 의혹을 제기하기까지 했다. 당시 대통령 경호실과 공군 관계자들은 ‘착수금 삭감’이 의결된 뒤에도 천용택 당시 국회 국방위원장 등을 만나 ‘지휘헬기 사업 추진 필요성’이라는 문건을 전달하며 내년 예산에 반영해줄 것을 요청했을 정도로 이 사업에 대단한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그 뒤로도 국방부는 매년 똑같은 예산안을 올렸지만 국회에서 거부당했다.
올해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또다시 국방부는 총 1천2백75억원에 이르는 대통령 전용헬기 3대 도입 사업을 추진하고 이를 위해 내년 국방예산에 4백20억원의 신규 예산을 신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야당은 이에 대해 “예산 낭비”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정기국회 예산심의에서도 ‘순순히’ 국방부의 예산안에 도장을 찍어주지는 않을 전망이다. 이승철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9월18일 열린 국회 운영위에서 “공군의 유력 장교, 군수 전문가에게 문의해 보니 대통령 전용기로 현재 쓰고 있는 것을 사용하는 데 전혀 하자가 없다고들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전시상황도 아닌데 굳이 성능 좋은 새 헬기를 구입하려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항공업계의 한 관계자도 이에 대해 “통상 헬기 수명의 경우 기종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엄격하게 계산해도 15~20년이다. 그리고 대부분 이보다 더 오랫동안 운용된다. 육군이 운용하는 UH 기종도 무려 40년 동안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아무리 대통령 헬기라고 하지만 이들과 비교할 때 너무 빨리 바꾸는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 현 전용헬기의 개조 전 모델인 UH-60. 위는 교체 전에 사용했던 AS-332L1 슈퍼 푸마. | ||
그리고 개조한 헬기도 처음부터 귀빈용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어서 방음이 잘 안되고 방탄능력도 제한적이라 대통령 경호에도 어려움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통령 경호실 양재열 차장도 국회 답변에서 “일반 헬기는 내구연한을 16~18년으로 본다. 그런데 전용기는 최소한 안전을 고려해 15년 정도로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한이 거의 끝났기 때문에 이번 예산에 반영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런 점 때문에 국방부는 하루빨리 새 헬기를 구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국방부가 밝힌 대통령 전용헬기의 개조와 관련해서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경재 의원은 최근 낸 보도자료에서 “청와대는 지난해 12월, 99년 납품된 신형 UH-60P 기종 2대를 육군으로부터 차출해 27억원을 들여 대통령 전용헬기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밑의 철판을 방탄으로 교체하는 등 리모델링 경비로 27억원을 사용했는데 예산 출처가 불분명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국방부 관계자는 “공중방공 전력투자비 가운데 집행잔액을 사용했다”고 답변했다. 한편 한나라당 이승철 의원은 “불과 몇 달 전인 지난해 12월에 27억원이나 들여 헬기를 리모델링했으면 앞으로 더 쓰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일 텐데 굳이 새 헬기를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반문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헬기를 자주 사용하는 편이다. ‘어가’ 행렬이 이어지면 경찰의 통제로 교통체증이 자주 일어나는 것을 염려해 하늘 길로 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천청사나 성남공항으로 갈 때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헬기를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통령 경호실이 헬기 안전에 각별한 신경을 쓰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현재 대통령이 이용하는 헬기의 경우 기능에 별 문제가 없어 아직은 더 타고 다녀도 된다는 게 국회 국방위 야당 의원들의 시각이다. 더욱이 지금 군에서 운용하고 있는 헬기 5백여 대가 기령이 노후화돼 교체가 시급한 실정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국방부는 15조원을 들여 한국형 다목적헬기 개발을 추진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다. 국회가 지난 4년 동안 국방부의 대통령 전용헬기 구입 예산을 배정하지 않은 것은 헬기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쓰는 데까지 쓰고 구입하라는 우선순위의 문제라는 것.
국회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의 안전이 최우선적으로 중요하지만 아직 교체할 정도로 기령이 노후화되지 않았다고 본다. 우리가 대통령의 안전을 담보로 이런 모험을 할 리는 없지 않은가. 또한 앞으로 국방부가 꼭 구입해야 할 무기 리스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런데 대통령 헬기가 그중에서 최우선이 돼야 하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국회 국방위 소속 한 의원측은 “과거 전용헬기 교체 논란 때 청와대 관계자들이 ‘만약 이회창 (당시) 총재가 차기 대통령이 되면 당신들이 나서서 할 일 아니냐’는 푸념까지 했다”면서 “코드원 헬기는 국가원수의 생명을 책임지는 것은 물론, 상징성도 있는 게 아니냐. 전용헬기를 보다 안전하고 성능이 좋은 것으로 바꾸고, 쓰던 전용헬기는 군부대에서 운용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란 때문에 국방부가 신청한 대통령 전용헬기 예산 확정은 이번 정기국회의 예산안 심의 때 또 한번 진통을 치를 것으로 보인다. 과연 노 대통령은 임기 중 새로운 헬기를 타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