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기업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둘러싸고 뒷말이 무성하다. 사진은 계열사 대우건설을 내놔야 하는 금호아시아나 본관 건물. | ||
채권은행들은 지난 4월 말부터 국내 45개 대기업에 대한 재무구조 평가에 들어갔다. 자금압박에 시달리던 기업들의 자구 노력이 미흡한 것으로 판단한 정부가 금융당국에 “강력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직후였다. 평가 결과 채권은행들은 부채비율 현금흐름 등을 근거로 금호아시아나 동양 동부 대주 애경 유진 하이닉스 대한전선 GM대우 등 9개의 대기업들을 ‘불합격’으로 판정하고 재무약정을 맺었다.
채권은행들과 재무약정을 맺은 대기업들은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주요 계열사 및 자산을 매각해야만 했다. 가장 관심을 모았던 금호아시아나는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과의 줄다리기 끝에 대우건설을 내놨고, 대한전선 동양 애경 유진 등 다른 대기업들도 잇달아 자금 확보 방안을 발표했다.
재무약정을 바라보는 재계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우선 9개 대기업 중 대부분이 그동안 인수·합병(M&A)을 통해 공격적인 경영을 해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자업자득이라는 평이 나왔다. 반면 극심한 경기침체 등 불가피한 외부 요소도 유동성 위기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핵심 계열사 매각을 강요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란 반론도 제기됐다.
특히 해당 대기업들은 “경제 상황만 호전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는데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재무약정을 맺은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다른 방법은 제쳐두고 무조건 핵심 계열사를 내놓으라고 해 당황스러웠고 안타까웠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는 것처럼 우리라고 (그 계열사를) 내놓고 싶었겠느냐”라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 관계자도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어려울 수도 있고 잘 될 수도 있는데 조금 상황이 어렵다고 이런 식으로 하면 앞으로 국내 기업 중에서는 대형 M&A에 나설 곳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채권은행들이 당초 ‘형식적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재무약정을 통해 강한 대책을 요구하고 나서자 명단에서 빠진 대기업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특히 재무평가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고도 체결 대상에서 제외된 곳들은 지금쯤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것으로 재계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채권은행들의 재무평가가 한창이던 지난 5월 중순 금융권에서는 14~15개의 대기업들이 재무약정을 맺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이 가운데 9개 대기업만이 선정됐고 재계의 시선은 금호아시아나의 대우건설 매각 등 재무개선 작업에 쏠렸다.
이렇게 막판에 기사회생한 대기업들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었다. 재무제표만 놓고 봤을 때는 재무약정을 체결한 대기업들과 별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더 악화된 상황인데 구제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발표 막판에 리스트에서 빠진 것으로 알려진 한 대기업의 관계자는 “채권은행으로부터 불합격 판정을 받고 부랴부랴 구조조정 방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빠졌다는 소식을 뉴스를 보고 알았다. 회사 내부에서는 우리 회장님과 정치권 인사의 친분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고 전했다.
또 다른 대기업의 경우 업종의 특수성이 감안돼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작 금융권에서는 ‘로비의 힘이 통했다’는 루머가 돌았다. 금융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그 기업과 비슷한 업종의 대기업은 (재무약정을) 체결했는데 부채 상황은 오히려 명단에서 빠진 쪽이 더 좋지 않더라. 채권은행이 재무평가 불합격 판정을 내린 후 마지막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빠졌던 것으로 안다”면서 “루머처럼 로비와 같은 외적 요인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번에 가장 많은 6개 대기업과 재무약정을 맺은 산업은행의 한 관계자는 “한 대기업이 재무평가 도중 자금 확보 방안을 발표하면서 명단에서 빠졌지만 다른 곳과 비교해보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었을 뿐 아니라 자금 사정이 나아진다는 보장도 없었다는 게 내부 결론이었다. 정부의 재촉으로 인해 서두르다 보니 공평한 선정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재무약정을 맺은 대기업 중에서도 그 내용을 놓고 형평성 논란이 일고 있다. 일부 대기업은 채권은행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대기업은 가혹하리만큼 회사 구조조정에 내몰렸다는 것이 골자다. 여기에 관여했다는 실세 정치인 몇몇의 이름도 오르내린다. 또한 ‘금호아시아나가 매물로 내놓을 가능성이 있는 대한통운을 노리고 한 대기업이 뒤에서 힘을 썼다’ ‘경쟁사가 명단에 포함되도록 로비했다’ 등과 같은 확인되지 않은 ‘설’들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청와대를 비롯한 사정당국은 지난 6월부터 금융권을 중심으로 이러한 말들이 확산되자 확인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에 직보한다는 한 사정당국 관계자는 “첩보로 입수되는 내용들이 하나같이 굵직굵직한 내용들이다. 액수만 해도 수백억 원이 넘고 연루된 인사들도 핵심인사들이라 확인해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털어놨다.
이처럼 잡음이 끊이지 않자 금융당국도 진화에 나서고 있다. 진동수 금융위원장이 지난 7월 3일 한 공개석상에서 “재무약정을 체결하지 않은 대기업도 스스로 취약 요인을 점검해 자율적 구조조정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힌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 듯하다. 그럼에도 강력한 구조조정을 당하고 있는 대기업들의 ‘피해의식’이 줄어들지는 의문이다. 금호아시아나의 한 관계자는 “왜 할 말이 없겠느냐.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솔직히 억울한 측면도 많다”면서도 “그렇다고 칼자루를 쥐고 있는 채권은행 및 정부와 대립각을 세울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