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머니 사정이 뻔한 직장인들에게 경조사비는 때론 고민거리로 다가온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결혼식 축의금 내면서 ‘상부상조’란 말을 자주 떠올린다고들 한다. 그러나 독신주의자들에겐 그리 와 닿지 않는 표현이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K 씨(여·35)는 “독신으로 살겠다”는 마음을 먹은 지 꽤 오래됐다. 이렇다보니 결혼식 축의금 내는 일이 ‘의미 없는 투자’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아는 사람이 결혼한다고 해서 다 챙겨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폭넓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지 않아서 경조사비 지출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아요. 하지만 돈 문제를 떠나 꼭 가야 되는 곳 아니면 가지 않습니다. 결혼식 자체가 너무 형식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서 불만인데 굳이 친분도 없는 사람과 얄팍한 인간관계를 유지하자고 가는 것은 의미 없다고 봅니다. 준 만큼 받아야 한다는 투철한 생각 때문에 마음으로 준비하고 축하해야 할 행사가 비즈니스로 전락한 것 같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K 씨는 나이가 있는 만큼 결혼식보다는 돌잔치 초대를 받는 경우가 더 많다. 축의금으로 얼마를 내든 독신주의자 K 씨에게는 ‘돌려받을 수 없는’ 지출이다. K 씨는 “직장에서 업무상 형식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도 다 같이 걷어서 내는 분위기면 빠질 수 없다”며 “솔직히 아까운 마음도 든다”고 털어놓았다.
그래픽 디자이너 O 씨(여·34)도 경조사비 때문에 고민하는 일이 잦아졌다. K 씨 같은 독신주의자가 아닌 자칭 ‘골드미스’인 O 씨는 결혼한 친구들이 많아진 탓에 경조사비 부담이 점점 커지고 있다.
“친구들은 대부분 다 결혼했고, 돌잔치가 더 많은 상태예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친분이 깊든 안 깊든 아는 사람은 늘어가고 물가가 오르듯 경조사비 금액도 매년 오르더라고요. 20대 때야 2만~3만 원대로 해결이 됐지만 지금은 직급도 있고 해서 최소 5만 원입니다. 언젠가 저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받을 수 있는 돈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결혼에 대한 생각이 불투명해지다보니 잘 모르겠어요. 상환을 기약할 수 없는 ‘적금’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하나요.”
O 씨는 장례식 같은 경우 어지간하면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친분이 두텁지 않더라도 슬픈 일을 갑작스레 당한 이웃을 돕는 부조 문화는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반면 수시로 날아드는 청첩장들 중엔 반갑지 않은 것도 제법 있다고 한다.
경조사비 부담에서 독신남 역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미래 준비에도 빠듯한데 수시로 빠져나가는 경조사비 내역을 보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올 지경. 대기업 계열 제조업체에 근무하는 J 씨(32) 역시 주변 경조사 챙길 때마다 경제적 부담을 떨쳐내기 어렵다고 한다.
“직장 내 경조사가 생기면 공지에 알림으로 뜹니다. 게시판에 가서 사인하면 월급에서 바로 공제가 돼요. 형식적인 인사치레에 불과하지 않나요. 진정한 ‘축하’의 의미가 결여된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봐요. 하지만 회사생활에 있어선 중요하더군요. 어떤 날은 눈 깜짝할 새 10만~20만 원이 훌쩍 날아갈 때도 있어요.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생각은 하지만 한창 결혼 자금도 모아야 하고 친구들 만나 돈 쓸 일도 많고 한데 부담이 안 될 수가 없죠.”
자동차 회사에 근무하는 H 씨(31)도 얼마 전 친구에게 경조사비 관련 넋두리를 했다. 매달 나가는 경조사비용을 따져 합산해보니 연간 지출액이 예상보다 컸던 것이다.
“자영업을 하는 친구들은 경조사비에 대한 ‘선택권’이 저보다는 자유로운 편이에요. 저는 업무상 내야 할 때도 많거든요. 그래도 (자영업 하는 친구가) 제 이야기를 듣더니 많이 공감해 주더라고요. 어떤 달은 달력에 동그라미가 매주 있어요. 결혼식 아니면 돌잔치죠. 아무리 데면데면해도 기본이 3만 원이고 친분이 있으면 5만 원 이상이죠. 아버지가 쓰시는 경조사비도 상당해요. 이렇게 따지면 한 집안에서 나가는 경조사비가 한 달에 80만~90만 원이 넘을 때도 있다니까요.”
아직 싱글이기 때문에 나중에 돌려받겠거니 생각하려고 하지만 당장 힘들어 죽겠으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다. H 씨는 “뭘 그런 걸 가지고 징징대고 고민하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우리 같은 직장인들에게 경조사비가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라 단언한다.
나이가 많을수록 경조사비 부담은 커진다. 회사 내에서 직급이 높아지면 체면상 내는 금액에 인색할 수도 없다. 낼 까 안낼 까 고민하기도 어렵다. 무조건 내야 체면이 선다. IT 회사 11년 차인 N 씨(40)는 경조사비로 용돈이 바닥날 때가 많다.
“(경조사비를) 용돈 한도 내에서 어떻게 해보려 하는데 이따금 초과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아내한테 말을 하는데 나쁜 용도로 쓰는 돈이 아닌데도 괜히 미안해지더라고요. 차장급이라 적게 낼 수도 없는데다 별로 친분 없는 사람이라 해도 참석할까 말까 주저할 수도 없어요. 업무상 알게 된 사람들의 결혼식이나 돌잔치 참석비용은 솔직히 아까워요. 저는 이미 결혼했고 아이들도 많이 컸으니까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체념하고 그냥 축하해주자고 다짐하지만 물가 따라 높아지는 경조사비 따라잡기가 너무 힘들어요.”
연차 높은 상사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신입사원들도 경조사비에 대한 나름의 고충이 있다. 편집디자이너로 근무하는 L 씨(23)는 얼마 전 경조사비 때문에 곤란한 경우를 겪었다고 한다.
“한번은 부서 내 디자인실장님 결혼식이 있었는데 부담주지 않으시려는지 정식으로 청첩장을 주진 않으셨어요. 하지만 결혼하신다는 건 알았죠. 알면서도 당장 박봉의 현실 때문에 모른 척했는데 매번 얼굴 뵐 때마다 미안하더라고요. 또 한 번은 어느 직원 결혼식 때였는데 그 달은 이런저런 일로 너무 부담이 돼서 평소보다 축의금을 조금만 냈어요. 그런데 마주칠 때마다 미안하고 해서 ‘차라리 어렵더라도 그냥 넉넉히 내고말 걸…’ 하는 생각을 했어요.”
10년 전 한국소비자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1인당 평균 지출 경조사비는 2만 8000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보통 5만 원 이상을 낸다. 10년 새 두 배로 뛴 셈이다. 흔히들 ‘낸 만큼 돌려받는다’고 믿지만 물가 상승 속도를 고려하면 결국 100% 돌려받지는 못하는 셈이다. 축하와 위로의 마음에 더 무게를 두려 애써도 자꾸만 얇아지는 지갑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게 직장인들의 현실이다.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