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 ||
지난해 한 기업에서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함께하고 싶은 선배의 유형은 무엇인지가 질문이었다. 무려 71%가 ‘인간성이 좋은 선배’를 꼽았다. 이는 반대로 인간성이 나쁜 선배가 가장 꺼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품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K 씨(여·30)는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뺀다는 옛 속담을 몸으로 느꼈다. 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한숨 쉬며 주변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한 것도 여러 차례다.
“다른 경쟁사에서 경력직으로 온 선배가 있었는데 나이는 몇 살 많았지만 경력으로는 별 차이가 없었어요. 이직해 오자마자 팀장한테 딱 붙어서 부쩍 친해지는가 싶더니 메신저로 둘이서만 ‘밀담’을 나누더군요. 한번은 제가 의견을 물었던 기획안을 처음 들을 때는 별로라더니 팀장한테 몰래 보고하데요. 그것도 선배가 메신저를 켜놓고 자리를 비워 우연히 알게 된 거예요.”
“퇴근 후 술자리는 남자끼리 가자”는 둥 알게 모르게 K 씨를 따돌리던 선배가 급기야 기획안까지 가로챈 것이다. 뒤늦게 팀장한테 가서 수습하기에도 늦은 때였다. K 씨는 “책략과 모략을 일삼는 선배를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며 “한편으로는 후배를 그렇게 경계하고 양심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 못나 보였다”고 털어놨다.
선배가 본성은 착해도 사고방식이 유연하지 않으면 후배들이 고생을 할 수도 있다. 경영컨설턴트 A 씨(32)는 답답하고 권위적인 선배 때문에 고생한 기억이 있다.
“아버지와 형이 군인인 한 살 많은 선배가 있었는데 항상 태클을 걸었어요. 외근 나갔다 퇴근시간이 가까웠는데도 사무실에 굳이 들어와 보고하고 가라고 하질 않나, 간접비를 줄인다고 밥도 싼 것만 먹이더라고요. 술 먹고 회사 흉만 본다고 회사 동기 모임에도 못 가게 했으면서 정작 본인은 동기모임 갔다가 장례식 갔다가 다시 회사로 복귀하는데 참 어이없었죠.”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A 씨를 애먹이며 애사심을 불태우던 선배는 가장 먼저 회사를 그만뒀다. 그는 “아직도 누가 가장 끔찍했던 선배를 꼽으라면 그 선배를 예로 든다”며 “후배는 물론 심지어 선배들한테까지 군인정신을 강요해 팀 내 골칫거리였다”고 고백했다.
나이 많은 후배가 선배에게는 껄끄러운 존재이듯 나이 어린 선배도 후배 입장에서 편할 수만은 없다. 이런 경우 나이가 어려 무시당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지나친 경계심으로 후배를 닦달하는 선배가 대부분이다. 그래픽 업무를 담당하는 B 씨(여·31)는 나이가 더 적은 선배를 자주 만난다. 업무 특성상 나이보다는 경력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쪽 일은 나이보다는 업무 숙련도가 중요하죠. 2년제를 나와서 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선배들의 경우 4년제를 졸업하고 관련 학원을 다니다 온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어리지만 경력은 많아요. 그래도 살아온 날이 있는데 대뜸 반말을 하지 않나, 빤히 보이게 일부러 강하게 나오는 걸 보면 속이 편치 않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요. 선배 대접해 줘야죠.”
게임회사 프로그래머 S 씨(29)도 비슷한 경우다. 프로그래머들도 나이보다는 경력이나 실력이 앞선다.
▲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 | ||
개인적인 처우 말고 공적으로 업무상 받는 스트레스도 상당하다. 과다한 업무로 야근을 일삼게 하는 선배도 있고, 업무 실수를 떠넘기는 야비한 선배도 있다. 홍보대행사에 근무하는 J 씨(30)는 이외에도 소소한 일로 신경을 긁어 짜증을 유발시키는 선배가 제일 괴롭다고 하소연했다.
“차라리 큰 거 한 건만 시키고 말면 좋겠는데 자질구레한 일들을 자꾸 시키는 선배가 그렇게 밉더라고요. 덩치가 큰 일은 못하면 못 하겠다 거절이라도 하겠는데 작은 일들은 귀찮지만 안 해주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한 번 해주면 매번 시키니 곤욕이었죠. 개인 업무로 받은 메일에 첨부된 파일 다운은 으레 제 몫이었어요. 간단한 컴퓨터 관련 업무도 배워서 하면 될 텐데 모르겠다고 손사래를 치면서 안 해요. 그렇다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고 늘 부탁만 하죠. 화 한 번 못 내고 속으로만 삭였습니다.”
J 씨는 나중에 좋게 웃으면서 자질구레한 부탁은 거절했지만 선배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한창 바쁜 와중에도 잔일을 시킬 때는 정말 화가 치밀어 오른다”며 “불만을 얘기해도 ‘속 좁게 뭘 그러냐’고 핀잔만 들어 황당했다”고 말했다.
작은 일이라 볼멘소리 한 번 못하고 스트레스만 쌓여가는 후배가 또 있다. 금융업계의 Y 씨(28)는 옆 자리 사수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전 아침에 출근하면 매일 자판기 커피와 담배 한 대로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한번은 선배도 커피랑 담배를 달라고 하기에 흔쾌히 드렸죠. 그때부터 시작이에요. 매일 아침 모닝커피와 담배 ‘헌납’이 자동이 됐어요. 담배는 더 화나는 게, 제가 담배 피우러 갈 때마다 따라 나와서 수시로 얻어 피웁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그러면 정말 짜증나거든요. 큰 것도 아니라 괜히 말했다 치사한 사람 될 것 같아 말도 못하고 속으로만 앓고 있어요.”
전문가들은 “선배와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경우 감정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공과 사를 구분해 행동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적으로는 충분히 존경하고 있다는 뜻을 내보이면서 공적으로 관련된 스트레스에 관해서는 적정선에서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스스로 선배가 됐을 때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주었던 선배처럼 되지 않는 것이다.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