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전무 | ||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삼성SDS 관련 배임 혐의에 대해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이 전 회장 측이 대법원 재상고를 포기하면서 10년여를 끌어온 삼성 관련 재판의 긴 여정이 막을 내렸다. 재계 일각에선 유죄판결을 수용하는 불명예(?)를 무릅쓴 삼성그룹이 ‘황태자’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 중심의 ‘포스트 이건희’ 체제로 가속페달을 밟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재용 이부진 이서현, ‘이건희 2세들’ 행보의 오늘과 내일을 조명했다.
최근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의 아들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현대차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이재용 전무의 승계작업 역시 탄력을 받게 될 것이란 전망이 재계에서 나돌고 있다. 그러나 삼성그룹 측은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보인다. 지난해 이건희 전 회장의 퇴진 이후 시작된 계열사별 독립경영체제가 잘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계에선 아들로의 원활한 승계를 위해 기나긴 재판과정을 겪은 이 전 회장이 본격적인 ‘이재용 시대’를 열기 위한 구상에 골몰하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재용 전무는 삼성에버랜드의 지분 25.10%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상 이 전무가 그룹 경영권을 차지하는 데 법적인 걸림돌은 없다. 문제는 명분과 인맥이다. 뛰어난 경영자적 자질을 보여 주주들의 인정을 받는 동시에 그룹 내 인사들의 신망을 얻어야 그룹 장악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재용 전무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삼성전자 외에도 그룹 주요 계열사들의 경영 사안을 정기적으로 보고받고 있다는 관측이 재계에 흘러 다닌 지 오래다. 삼성 측에선 줄곧 부인해왔지만 이 전무 승계작업을 위한 움직임은 이미 이곳저곳에서 부산하게 일어나고 있다. 10년여 전부터 ‘이재용 시대’ 핵심인력으로 눈도장을 받은 젊은 중간간부들이 해외유학 등을 통해 집중 육성돼왔으며 그들 중 일부가 이미 유력 계열사 임원직에 앉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 (왼쪽)이부진 전무, 이서현 상무 | ||
한편 이 전무의 안정적 승계를 위한 이 전 회장 딸들의 계열분리 가능성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이 전 회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의 경우 올 초부터 그동안 가려져왔던 경영자적 자질이 주목을 받았다. 이부진 전무에 대해 일부 재계 관계자들은 “얼굴 생김새부터 시작해 업무 추진 방식까지 아버지를 꼭 닮았다”는 평을 내놓는다.
이부진 전무의 경영능력에 대한 주변의 평가도 후한 편이다. 이 전무가 진두지휘한 인천공항 면세점 신규 입점 등에 힘입어 호텔신라 매출과 영업이익 신장이 이뤄진 까닭에서다. 호텔신라의 지난해 매출액은 8748억 원, 영업이익은 531억 원이었다. 이는 2007년 매출액 4949억 원과 영업이익 235억 원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최근 호텔신라의 몸 불리기와 관련해 재계에선 “전망 좋은 사업을 골라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면에선 이재용 전무보다 이부진 전무가 이 전 회장을 더 많이 닮았다”고 평할 정도다.
그런데 재계 일각에선 ‘삼성가 계열분리와 관련해 향후 이부진 전무보다 이 전 회장 차녀 이서현 제일모직 상무가 더 큰 주목을 받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제일모직은 기존의 섬유업에 첨단 화학과 전자소재 사업을 성공적으로 ‘장착’하면서 이미 소그룹 형성의 기반까지 닦아놓은 상태다. 증권가에선 수년 전부터 “제일모직이 조만간 독립해 소그룹군을 형성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돼왔다.
제일모직은 지난해 3조 7277억 원의 매출, 2401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매출액이나 영업이익에서 호텔신라의 4배를 뛰어넘는다. 더욱 비교되는 부분은 흑자규모다. 지난해 제일모직의 당기순이익은 1574억 원으로 호텔신라(249억 원)의 6배가 넘는다.
8월 27일 현재 제일모직 주가는 5만 600원으로 같은 시점 호텔신라 주가(1만 5850원)에 비해 3배 이상 높다. 그런데 이 전 회장의 두 딸은 아직 호텔신라나 제일모직 대주주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분가 여건을 갖추기 위해선 이서현 상무가 이부진 전무에 비해 3배 이상의 돈을 들여야 하는 셈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대주주 일가의 승계과정에 반대 목소리를 낼 수도 있는 외인 주주들의 지분율에서도 이서현 상무 측의 부담이 더 크다. 호텔신라의 외인 지분율은 9.5%에 불과한 반면 제일모직은 22.5%에 이른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