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이온을 100㎚(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의 미세한 입자로 만든 ‘은나노’. 이 은나노는 살균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면서 우리 생활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실생활에 흔히 쓰이는 가전제품과 생활용품에 은나노 물질을 포함한 제품들이 많이 나온 것이다. 그 사이 해외에서는 은나노 제품에 대한 유해성 논란이 일었지만 한국에서만은 예외였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최근 국내에서도 은나노 입자가 독성을 가지고 있다는 실험 결과가 발표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험 결과에 대해 은나노 관련 제품 생산업체들은 “제품에 포함된 은나노 농도가 아주 낮기 때문에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래도 소비자들의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다. 은나노 제품의 안전성 논란을 따라가 봤다.
지난 8월 24일 식품의약품안전청은 한국생활환경시험연구원에 의뢰해 은나
노 입자의 흡입독성을 시험한 결과 동물실험에서 폐와 간에 독성을 나타냈다고 발표했다. 이런 결과는 은나노가 살균과 향균 효과가 뛰어나 생활용품과 의료기기 영역에서 점점 확산되는 가운데 나온 것이라 큰 파장이 일고 있다.
연구를 담당했던 호서대학교 융합기술연구소 유일재 교수는 “은나노 입자를 90일 동안 공기로 흡입한 흰쥐의 조직검사 결과 흡입독성이 주로 폐와 간, 신장 조직에 나타났다”며 “일부 쥐에서는 면역세포의 변화도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이번 연구는 나노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에게 독성을 나타내는 나노물질의 농도를 파악하기 위해 매우 높은 농도로 동물실험을 진행한 것”이라며 “소비자가 생활용품을 통해 노출되는 농도는 이보다 훨씬 낮다”고 선을 그었다.
‘은나노에 어느 정도 노출이 됐을 때 안전한가’에 대한 기준을 만들기 위해 이번 실험을 실시했다는 것. 최고 농도를 흡입했을 때 나온 결과이기 때문에 실제 생활에서 이 정도의 농도에 노출되기란 쉽지 않다는 얘기다. 때문에 유 교수는 “이번 실험 결과로 은나노 제품이 위험하다고 보는 것은 안 될 일”이라고 강조하며 “은나노 입자가 공기 1㏄당 100만 개가 넘어야 인체에 해를 줄 수 있어 일상적으로 쓰는 제품에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은나노 관련 상품을 제조·판매하는 업체들도 “제품에 사용하는 은나노 물질은 낮은 농도로 전혀 유해하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면서도 업체 관계자들은 ‘불똥’이 자신들에게 떨어질까 긴장하는 눈치다.
은나노 살균위생수기를 판매하는 회사 관계자는 “이번 실험으로 시민들이 은나노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될까봐 걱정”이라며 “은나노는 낮은 농도로도 뛰어난 살균 작용을 하는 등 잘 사용하면 아주 유용한 물질”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우리 제품은 특허를 받은 만큼 인체에 무해해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제품의 은나노 부분이 신체와 직접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 회사들은 상대적으로 느긋한 편이다. 은나노 함유 노즐을 사용하는 비데 회사 측은 “노즐의 세균번식을 막는 용도”라며 “세척물에는 함유되지 않기 때문에 인체에 안전해 소비자들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은나노 스팀청소기를 생산하는 회사도 “이번 실험 결과를 예의주시했다”면서 “스팀청소기 안의 은나노 항균 물통은 인체에 흡입될 수 없어 안전하다”고 말했다.
은나노라고 광고했지만 이번 기회에 은나노가 아닌 은이온을 사용했다고 밝히는 회사도 나왔다. 은이온도 은나노처럼 살균효과가 있지만 불안정한 물질이어서 빛과 만나면 변색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지금껏 은나노 이온수지 항균 필터를 사용했다는 가습기 업체 측은 “살균효과를 위해 미세한 양의 은이온이 사용됐을 뿐”이라며 “소비자들이 쉽게 인식할 수 있게끔 은나노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는 삼성전자도 비슷한 경우가 돼 버렸다. 최근 미국 환경보호국(EPA)이 “삼성 은나노 세탁기는 나노 기술이 적용된 제품이 아니다”는 의견을 내놓은 것. EPA는 “삼성 세탁기가 은나노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고 은이온이 나왔기 때문에 ‘이온생성기기’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삼성은 2005년 말 은나노 세탁기를 출시하고 살균·탈취 효과를 지속시키는 기능 등을 홍보하며 대대적인 마케팅을 벌여왔다. EPA의 발표로 유해성 논란에선 벗어났지만 대대적인 마케팅이 머쓱해졌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마지막 헹굼 과정에서 은이온수가 발생하는 삼성 은나노 세탁기는 배출되는 농도가 상당히 낮아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며 “은나노 세탁기가 나올 당시 나노 입자의 살균력 등이 부각되고 있어서 마케팅 차원에서 나노라는 용어를 채택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나노와 이온의 차이를 소비자들에게 설명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사용한 마케팅 용어가 오해를 산 것 같다”며 “명칭 조정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탰다.
삼성전자의 맞수 LG전자도 3년 전 은나노 세탁기를 제조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LG전자 관계자는 “LG 세탁기는 한때 곰팡이가 많이 생기는 세탁통의 항균 효과를 위해 은나노 기술로 세탁통 외부에 소량의 은이 적용된 세탁기를 생산했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현재는 스팀으로 세탁통에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막아주는 ‘통스팀 기술’로 대체, 은나노 세탁기를 생산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로 나노 소재 물질에 대한 지속적인 안전성 연구와 함께 명확한 기준도 세워져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은 2008년 나노기술 수준이 미국 대비 75% 수준까지 향상돼 세계 4위를 차지했다. 이처럼 우수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관련 제품도 다양하게 보급되어 있지만 나노에 대한 인식 수준은 걸음마 단계로, 제대로 된 안전성 기준조차도 없는 게 현실이다.
녹색소비자연대 조윤미 본부장은 “최근 은나노라는 이름을 달고 가전제품과 생활용품 등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안전성과 유효성 검사 기준이 마련되지 않아 소비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며 “시중에서 판매하는 제품이 정말 은나노 기술을 사용했는지, 만약 사용했다면 얼마만큼의 은나노 입자를 함유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기업 광고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조 본부장은 “특히 기업들이 은이온이 나오는 제품을 은나노라고 광고하며 소비자들을 속인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행동”이라며 “국내 실험으로 나노 물질이 독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 만큼 정부 차원에서 명확한 기준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윤구 기자 trus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