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론 안 당해_ 직무정지 3개월 상당의 제재 조치를 받은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이 명예회복을 위해 재심청구나 행정소송에 나설 태세다. 오른쪽은 모피아 인맥 핵심인사로 불리는 윤중현 장관. | ||
황영기 회장에 대한 금융당국의 중징계 사유는 우리은행장 재임 당시 파생상품 투자 손실에 있다. 황 회장이 지난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으로 재직하면서 투자한 상품으로 인해 우리은행이 1조 6000억 원가량의 손실을 입은 것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이 지난 3일 제재심의원회를 통해 황 회장에 대한 징계를 결정하면서 사후 책임을 묻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금융위원회는 금감원의 판단을 수용하는 결정을 내렸다.
금융권과 재계 일각에선 이번 사태를 사실상 모피아(옛 재무부 출신) 세력과 황영기 회장 간의 힘겨루기로 보고 있다. 예금보험공사가 최대주주인 우리은행의 부실 책임을 누가 지느냐와 더불어 황 회장이 우리은행 재임기간 동안 경영방식을 두고 예보와 마찰을 자주 빚었던 것이 단초가 됐다는 지적이다. 예보와 금융감독당국에 있는 모피아 인사들, 그리고 우리은행 현 경영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고 보는 시각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황 회장이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급부상한 점이 화를 불렀다는 지적도 있다. 강만수 대통령실 경제특별보좌관이 지난해 2월 기획재정부 장관직에서 물러나면서 그 자리에 윤증현 장관이 오르는 등 모피아 인사들의 정부요직 입성이 대거 이뤄졌다. 모피아 인맥 핵심인사로 불리는 윤 장관은 현 정권과 숙명적 라이벌인 노무현 정부에서 3년간 금융감독원장을 지낸 인물이다. 당시 인사를 두고 금융권에선 “현 정권이 우선적 과제인 시장의 신뢰를 위해 관료사회를 장악한 모피아에 구애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평을 내놓았다.
반면 황 회장은 모피아 관료 집단 출신이 아닌 인사들 중 현 정권하에서 가장 잘나가는 금융 실세로 통해왔다. 이명박 대통령의 서울시장 재직 시절 주거래은행인 우리은행의 수장으로서 이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황 회장은 이후 한나라당의 영입 리스트에 이름을 자주 올리곤 했다. 지난 대선 당시 이명박 캠프에서 경제살리기특위 부위원장을 맡아 대선 공신이 된 황 회장은 현 정부 출범 초기부터 유력 금융단체장 후보군에 끊임없이 이름을 올려왔다.
황영기 회장은 지난 정권 때 ‘이헌재 사단’ 일원으로 불렸던 바 있다. 모피아의 거목으로 통했던 이헌재 전 부총리와의 관계는 돈독했지만 삼성 출신인 황 회장을 모피아 관료 세력으로 묶기는 어렵다. 향후 경제관료직 입성도 유력해보였던 황 회장의 발목을 모피아 세력이 이번에 단단히 잡았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KB금융 내 일부 ‘반 황영기’ 세력이 황 회장을 가로막았다는 의견도 들려온다. 황 회장은 지난해 7월 KB금융지주 초대 회장에 오르면서 ‘스타 뱅커’로서의 입지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국민은행 출신이 아닌 황 회장의 등장은 KB금융 내 기득권층의 반발을 샀다고 한다. 지난해 황 회장 취임 당시 국민은행 노조가 ‘낙하산 인사’라며 출근저지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금융권 일각에선 우리금융 회장 시절 최대주주인 예보와 잦은 갈등을 일으켰던 것처럼 ‘검투사’라 불릴 정도로 타협을 모르는 황 회장의 경영방식이 KB금융 기존 경영진과의 마찰을 불렀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사정기관엔 ‘이번 황영기 회장 파문 배후에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금융권 실세 두 사람이 있다’는 첩보가 입수돼 확인 작업 중이라고 한다. 황 회장과 대립관계에 있던 이들 인사들이 황 회장에 대한 음해성 정보를 사정기관에 제보했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유례없는 중징계 처분을 받은 황영기 회장에 대한 현 정권 세력의 우호적 자세가 지속될지도 관심사다. 이들이 MB계 핵심인물인 황 회장 편들어주기를 통해 모피아 관료 집단에 맞각을 들이대려 할지를 두고 말들이 많다. 관가 주변에선 ‘황 회장 측이 정부 유력인사에게 보낸 SOS 메시지가 거절당했다’는 미확인 소문도 나돌고 있다. 황 회장의 서울고-서울대 선배이자 모피아 출신 현직관료 핵심인사인 윤증현 장관이 이번 파문 진행과정에서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도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금융권에선 국내를 대표하는 스타 뱅커로 군림해온 황 회장이 명예회복을 위해 재심청구나 행정소송 등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황 회장의 서울고-서울대 상대 인맥이 총동원될 전망이다. 황 회장 측이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세력의 치부를 캐기 위한 정보 수집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황 회장과 정적 관계로 평가받는 모피아 집단은 관료사회뿐만 아니라 금융권 그리고 주요 대기업에도 두루 포진돼 있다. 금융권에선 황 회장 인맥과 모피아 세력이 펼칠 힘겨루기가 금융권 울타리를 넘어 정·관·재계를 아우르는 세력다툼으로 확전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삼성 측이 이번 황 회장 파문에 어떤 반응을 취할지도 관심사다. 황 회장은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을 거쳐 삼성증권 대표이사를 지낸 이른바 ‘삼성맨’. 삼성이 은행업에 진출할 경우 초대 삼성은행장 영순위 후보로 꼽혀온 인물로, 삼성 측의 관리가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줄곧 들려왔다. 그러나 일각에선 삼성이 지난해 은행업 진출 포기 선언을 한 데다 삼성 재판 마무리 이후 승계논의와 조직개편설 등으로 어수선한 터라 이번 파문에 관여할 여력이 없을 것이라 보기도 한다.
금융권에선 황 회장에 대해 “능력은 뛰어나지만 적이 너무 많다”고 입을 모은다. 경제개혁연대(소장 김상조 한성대 교수)도 금융위원회 징계 발표 직후 논평을 통해 황 회장의 KB금융 회장직 즉각 사퇴를 요구하면서 황 회장 비토론을 거들고 나섰다. 2007년 3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우리은행장을 지낸 박해춘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지난 11일 우리은행장 재임 시절 손실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자진사퇴 의사를 밝힌 점도 황 회장의 향후 거취에 부담이 될 전망이다. 궁지에 몰린 ‘금융가의 검투사’는 과연 명예회복을 위해 어떤 칼을 뽑아들까.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