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서전 <16세 표류 난민에서 30조 기업가로> 발간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한창우 마루한 회장과 그의 아내 나가코. 사진제공=우먼센스 | ||
1931년 경남 삼천포(현 사천)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한창우 회장은 해방 직후인 1947년 10월 22일 열여섯의 나이에 밀항,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소년 한창우가 손에 든 것이라곤 어머니가 쥐어준 쌀 두 말과 영어사전이 전부였다. 무사히 일본 땅을 밟은 한 회장은 막노동 일터를 전전하며 번 돈으로 검정고시에 합격, 고교졸업 자격을 획득하고 호세이대학 경제학부까지 마쳤다. 당시 마르크스 경제학에 심취해 있던 그는 한국에 돌아와 정치가를 해보려는 꿈도 가졌지만 한국전쟁으로 귀국의 뜻을 접고 프랑스 유학을 결심한다. 평소 음악과 패션에 관심이 깊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유학비용을 빌리기 위해 한 회장은 인구 1만 5000명의 소도시 미네야마에서 조그만 파친코 가게를 운영하던 매형을 찾아갔다. 그러나 매형이 “패션 같은 것을 공부하겠다면 돈을 주지 않겠다”며 한 회장의 결심을 나무라자 “돈이라도 벌게 임시 점원으로 써 달라”고 요청, 가게 일을 보게 됐다. 한 회장과 파친코의 첫 만남이다. 그렇게 몇 달 후 인근 가게가 사세를 확장하면서 커지자 매형은 가게를 한 회장에게 넘겼고 결국 그 가게는 마루한 창업의 시초가 됐다.
한 회장은 기계 20대에 불과했던 가게를 불과 1년 만에 120대 기계가 들어선 대형 매장으로 탈바꿈시키는 수완을 발휘했다. 돈을 잃은 손님에게 담배를 건네거나 돈을 쥐어주면서 ‘돈만 밝히는 업주가 아니다’는 인식을 심어주며 단골을 늘려간 것이 짧은 기간 내의 성공비결이라면 비결.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잡겠다”는 장기적 안목이 실효를 거둔 셈이다. 여기서 번 돈으로 한 회장은 미네야마에 클래식 음악다방과 레스토랑을 내면서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사업가로 성장하게 된다.
한 회장이 승승장구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한 회장은 미네야마에서 가장 많은 기부를 한 사업가였음에도 1966년 미네야마청년회의소 발족 당시 한국 사람이란 이유로 가입을 못했다. 한 회장은 자서전을 통해 “내 몸에서 피가 역류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네야마에서 지낸 13년을 생각하니 설움만 밀려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은행융자를 받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다른 업체엔 보증인만 있으면 쉽게 대출해줬지만 한 회장은 한국인인 동시에 업종이 파친코였던 까닭에 좀처럼 융자를 받을 수 없었다. 이 같은 기억은 한 회장이 파친코를 야쿠자들이 배후를 봐주는 어두운 업종이 아닌 서민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서비스업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 계기가 됐다.
1967년 한 회장은 당시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던 볼링사업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일본 최고의 사업가가 돼서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은 미네야마청년회의소에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오기도 볼링사업 추진을 부추겼다. 그러나 볼링사업은 한 회장 인생에 가장 쓰라린 패배를 안겨줬다. 전국 각지에 볼링장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 수익성이 떨어진 데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여파로 일본 경제가 추락하면서 볼링장에 파리만 날리게 된 것이다.
볼링사업의 큰 실패로 한 회장은 당시 600억 원(현재 화폐 가치로 1조 원) 상당의 부채를 끌어안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에 연수를 갔던 고등학교 2학년생 큰아들이 강물에 빠져 죽는 일이 벌어졌다. 아들의 죽음 이후 2년간 방황한 한 회장은 다시금 마음을 추스르고 파친코에 대한 재투자를 통해 천문학적인 빚 상환 도전에 나선다.
큰 빚을 지고 있었기에 자본이 부족했던 한 회장은 땅값이 싼 교외 지역에 소규모 파친코 가게를 하나둘 내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직원들과의 자리에서 “앞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스트레스 해소용 레저산업이 늘어날 것이다. 파친코에 능숙한 사람뿐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이나 주부들이 쉬기 위해 파친코를 찾게 될 것이다”고 공언했다.
한 회장이 볼링사업을 축소하고 교외 파친코 업소를 확장하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은 자동차 보급 확대로 사람들이 교외로 몰려나오기 시작한 무렵이다. 자연스레 한 회장의 파친코업소는 성황을 이뤘다.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던 빚 상환을 마무리한 1991년, 마루한은 어느 새 일본 내 점포 수 1위 파친코업체가 돼 있었다. 1995년 도쿄 시부야에 500억 원대 파친코빌딩을 오픈하면서 파친코 사업은 일본인들 생활 사이에 뿌리 내리게 된다. 젊은 여성 아르바이트생들을 고용해서 기존 파친코의 무거운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고객들이 집에 돌아갈 때 옷에 밴 담배 냄새를 제거하는 클리닝샤워룸, 부부나 연인을 위한 커플 전용 시트, 여성손님 전용 코너,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파친코대 설치 등으로 파친코 대중화를 이끌어냈다.
마루한은 2009년 현재 일본 재계 순위 20위권, 30조 원대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해 있다. 일본 전역에 249개 점포를 두고 있으며 종업원 수는 1만 명이 넘는다. 한 회장의 이 같은 성공은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고 돈을 쓰는 것은 예술”이라는 그의 지론과 무관치 않다. 파친코에서 수익을 올렸으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그 돈을 써야 하며 결국 그들이 자립하게 되면 마루한을 다시 찾게 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50년 넘게 사업을 일구며 터득해온 그만의 경영철학은 ‘마루한이즘’이라 불리기도 한다. 한 회장은 <16세 표류 난민에서 30조 기업가로>를 통해 더 큰 포부를 밝힌다.
“내 꿈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다음 달성 목표는 매출 50조 원 기업이다. 그렇다고 해서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마루한 가족은 예술 문화 음악에 대한 이해를 높이며 아시아 그리고 세계에 대하여 사회공헌을 할 수 있는 경제인이 되어야 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