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이란 기업이 퇴직금 지급 재원을 외부 금융회사에 적립하고 이를 기업 또는 근로자의 지시에 따라 운용, 근로자 퇴직시 연금 또는 일시금을 지급하는 퇴직급여제도 중 하나다. 근로자 입장에선 퇴직연금제도의 장점이 많다. 우선 기업이 파산하더라도 퇴직 적립금을 보호받을 수 있고 빈번한 퇴직금 중간정산을 막아 노후생활에 대한 버팀목 역할을 한다. 퇴직연금시장은 정부의 퇴직연금 육성 정책에 힘입어 최근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여기에다 이른바 ‘58년 개띠’로 대변되는 베이비붐 세대가 2010년이면 본격적인 은퇴를 시작한다.
이들은 소비와 생산의 주도 세력이었고 부동산 예금 주식 등의 보유자산에서도 다른 세대를 압도하며 우리 사회를 이끌었다. 대기업의 평균 정년이 55세인 점을 감안할 때 내년부터 시작될 은퇴 러시가 우리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 역시 퇴직연금은 사회적 안전망의 일부를 보완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들의 퇴직연금제도 도입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최근 퇴직연금제도를 도입한 사업장 수는 전체의 10%대에 불과한 실정이다.
지금껏 퇴직연금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열세를 보인 주요 증권사들은 시장 선점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특히 증권사가 운영하는 퇴직연금 상품이 지난 1분기(1~3월)에 은행·보험보다 평균 수익률이 앞선 것으로 파악되면서 증권사들이 퇴직연금시장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증권사의 상반기 평균 수익률이 은행과 보험사들보다 높았다. 이는 펀드와 주가연계증권(ELS) 상품들을 퇴직연금에 많이 포함시킨 결과다.
증권업계에서는 올해 자본시장법 시행으로 은행 보험 증권 자산운용 선물 등 금융 겸업화와 다양한 금융상품의 설계·운용이 가능해짐에 따라 오는 2011년 퇴직연금제도가 본격화할 경우 국내 금융업계의 판도를 뒤바꿔 놓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전문가들도 원금보장형 위주의 안전자산에 치우쳐 있던 국내 퇴직연금시장에서 앞으로 위험자산 비중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면서 증권·자산운용사들의 입지가 더욱 커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주요 증권사들은 퇴직연금시장 장악을 위해 전문인력 확충과 관련 연구소 개소 등 타 금융사들과의 차별화를 통한 경쟁력 확보에 나섰다. 특히 퇴직연금과 관련, 국내외 세미나를 개최해 해외의 성공적인 퇴직연금 정착 및 운용사례를 소개, 국내 퇴직연금시장이 올바른 방향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주도하고 있다.
보험업계는 30년 이상 축적한 운영 노하우를 집중 부각, 퇴직연금시장에서 다른 금융권의 공격에 대응한다는 전략이다. 우리나라에서 1961년 법정 퇴직금 제도가 도입된 이후 1977년 종업원 퇴직적립보험, 1999년 퇴직보험, 2005년 퇴직연금 등이 순차적으로 판매됐다. 퇴직연금의 가장 큰 특성 중 하나가 퇴직 적립금의 사외 예치라고 할 때 보험사들은 이미 1977년부터 30년 넘게 퇴직 적립금의 운용이라는 노하우를 쌓아왔다고 할 수 있다.
퇴직연금은 기본적으로 장기 상품인 만큼 자금을 장기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해야 한다. 그런데 보험사는 기본적인 상품구조가 장기여서 자금 또한 장기적으로 운용된다. 모든 투자가 마찬가지겠지만 퇴직연금은 노후를 대비한 마지막 보루라는 점에서 수익성과 함께 안전성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이 같은 능력은 종신보험 연금보험 등 장기 상품을 운용하고 있는 보험사에 강점이 있다는 의미다.
아울러 은행의 경우 가입자 사망시까지 연금을 지급할 수 없는 구조지만 보험사의 경우 종신연금을 원하는 고객에게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높다. 자산관리계약 형태를 보더라도 보험사는 은행과 증권사가 신탁계약만 취급할 수 있는 것과 달리 보험계약과 신탁계약을 모두 취급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은행과 증권사는 퇴직연금의 금융상품으로 정기예금이나 원리금보장형, 주가연계증권(ELS) 등을 취급할 수 있지만 보험사는 여기에다 이율보증형과 금리연동형 상품까지 제공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금리연동형을 보면 원리금이 보장되면서 금리가 연동되는 상품으로 금리가 상승하는 환경에서는 은행 예금에 비해 유리한 상품이다. 퇴직연금시장 전체 점유율 1위인 삼성생명만 해도 인력과 시스템 등 여러 측면에서 최고 수준을 갖추고 있다. 삼성생명과 함께 생명보험업계의 ‘빅3’인 대한생명과 교보생명, 그리고 손해보험업계 1위인 삼성화재도 퇴직 적립금의 안정적 운용 노하우를 강조하며 새롭게 부각되는 퇴직연금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보험·증권사의 공세 방어에 나서는 은행권은 금융권의 퇴직연금시장에서 적립금액 기준으로 절반을 넘어서는 등 독주 굳히기 전략을 세웠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권의 상반기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전체 8조 2597억 원 가운데 51.0%(4조 2157억 원)를 차지했다. 지난 5월 49.2%에 머물렀지만 6월 들어 50%의 벽을 넘어서게 된 것.
이에 비해 생명보험 손해보험 등 보험권은 36.5%(3조 154억 원), 증권사들은 12.5%(1조 286억 원)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은행권이 사회적 신뢰도나 주채권 은행 제도 등 기업에 대한 지배력 면에서 보험·증권사에 우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은행이 퇴직연금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보험·증권사 쪽은 할 말이 많다. “은행들이 대출을 미끼로 상대적으로 자금 조달 능력이 떨어지는 중소기업을 집중 공략한다”는 것. 또 “은행들은 퇴직연금 자금을 자행 예금으로 편입해 통합 운영하고 있는데 자산간 위험(리스크) 전이 개연성이 커 이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류민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