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9월26일 한 행사에서 인사말 도중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특히 앞으로도 43석의 ‘미니 여당’인 통합신당에만 기대어 정국을 운영할 경우 현실적으로 이라크 전투병 파병과 한국·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동의안, 내년 예산안 및 선거법·정치자금법 개정 등 주요 현안을 제대로 매듭지을 수 없음이 확인된 만큼 노 대통령으로서는 대 정치권 관계를 새롭게 설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멀게는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민주당, 자민련과 공조해 ‘총선 후 내각제 개헌 추진’ 주장이 확산되는 등 권력구조의 변경 문제가 정국 현안으로 등장하고 있는 만큼 노 대통령이 어떤 형식이든 이에 대한 입장 정리가 필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여권 핵심부에서는 노 대통령에게 일단 정치권과 일정한 냉각기간을 가질 것을 주문하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임명동의안 부결 이후 정국타개책이 당장의 파장을 줄이는 데 치중한 ‘단기 대책’보다는 내년 4월 총선 이전까지 전략·전술을 담은 ‘장기 대책’이 돼야 한다는 견지에서다. 노 대통령도 당면 현안인 후임 감사원장 인선에 대해 “차기 후보로 적합한 분을 신중하게 찾기 위해서도 너무 서두르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한 데다 ‘노심(盧心) 읽기’에 밝은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도 “당분간은 원칙대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냉각기가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노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으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대통령과 정치권 간 새로운 관계정립 문제가 전면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국정감사가 끝난 후가 되면 ▲각 교섭단체 대표연설(10월14~15일) ▲대 정부 질문(10월16~22일) ▲2004년 예산산 심의 등을 통해 내년 총선을 앞둔 각당의 입장과 노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 문제가 상당부분 드러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재까지 정치권에서 예상하고 있는 노 대통령의 정국 타개 구상은 기존 정국운영 노선의 유지 또는 수정 여부에 따라 크게 세 갈래로 나눠진다. 가장 먼저 거론되고 있는 것은 3야를 주축으로 한 ‘반 노무현 전선’ 구축 움직임에 ‘대 국민 직접정치 강화’로 맞서는 정면돌파형 전략. 노 대통령이 그동안 보여줬던 정치 스타일상 야권의 부당한 ‘횡포’에 적당히 타협하기보다는 이에 정면으로 맞설 것이란 분석이라 하겠다.
임명동의안 부결 이후 여권 핵심부가 보여준 ‘느긋함’도 이 같은 전망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전 김대중(DJ) 정권 때만 해도 99년 한나라당 서상목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 등 주요 현안에 대한 국회 표결에서 패배할 경우 ‘책임론’이 무성했으나 이번에는 딴판이다.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은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깨면 깨질 수밖에 없고 우리의 생명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고, 천호선 정무기획비서관은 “국회와 협조하겠지만 때론 국민을 향해 직접 호소할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는 형편이다.
▲ 지난 9월2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김근태 통합신 당 원내대표(위)와 박상천 민주당 대표가 대화 하고 있다. | ||
정치권에서는 노 대통령이 정면돌파 전략을 채택한다면 그의 실천 수단은 국민을 상대로 한 ‘직접정치’의 강화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주요 현안에 대해 국회의 협조를 얻는 데도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그보다는 국민들에게 직접 개개 정책과 결정의 정당성을 설파해 우호적 여론을 조성한 후 이를 토대로 정치권의 선택을 압박하겠다는 것. 이를 통해 정치권의 ‘반노 전선’ 구축 움직임을 ‘반 개혁 연합’으로 몰아붙여 내년 총선을 ‘개혁 대 반 개혁’의 구도로 이끌어 나가려 할 것이란 시나리오다.
그러나 청와대 참모진들 사이에서 힘을 얻고 있는 정면돌파 전략은 노 대통령의 개혁 의지와는 별개로 자칫 잘못될 경우 정국 경색의 장기화와 이에 따른 국정 표류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비판론도 적지 않다. 그래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분당사태 등으로 등을 돌린 이른바 ‘전통적 지지세력’을 다시 끌어안아야 한다는 ‘복원 전략’이다. 이 전략은 정치적으로는 우선 악화일로에 있는 통합신당과 민주당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바꾼 후 궁극적으로는 ‘여권 재통합’ 또는 ‘총선 공조’를 구축하는 데 있으며 통합신당 내 온건론자들이 주로 주장하고 있다.
복원 전략은 임명동의안 부결의 충격파가 이미 익숙해져 있는 ‘한나라당의 횡포’보다는 ‘민주당의 반란’이라는 새로운 현상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예상했던 것보다 지지세력의 균열이 초래한 후유증이 큰 것으로 드러났고, 특히 한나라당이 ‘권력 분점’을 미끼로 민주당을 내각제 개헌 대열에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는 만큼 이를 제어할 대책이 시급하다는 판단에서다.
복원 전략의 ‘키’(Key)는 갈수록 ‘반노’ 기류가 짙어져 가고 있는 호남권 유권자들을 다시 지지세력으로 돌릴 수 있느냐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부분은 노 대통령과 DJ의 화해 여부다. 대북 송금 특검문제와 민주당 분당 사태로 틈이 상당부분 벌어진 두 사람이 적절한 계기를 통해 관계를 복원한다면 노 대통령의 정국 장악력은 그만큼 배가될 수 있을 것이란 분석이다.
실제 김원기 김근태 이해찬 의원을 비롯한 통합신당 내 온건파 인사들 상당수는 정국 안정과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서는 ‘노무현-DJ’ ‘통합신당-민주당’간의 우호관계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근태 원내대표가 “민주당과는 정치노선상 하나이자 형제이므로 총선 전 민주당과 대연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힌 점이나, 통합신당 입당과 함께 당 의장을 맡을 것으로 알려진 정대철 민주당 전 대표가 “신당과 민주당이 선의의 경쟁을 펼친 뒤 언젠가 다시 합쳤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도 이 같은 기류를 대변하고 있다.
아직은 소수이기는 하지만 노 대통령이 민주당 탈당과 함께 명실상부한 ‘무당적 대통령’으로 국정을 운영하면서 집권 초 제시했다가 철회한 ‘분권형 대통령제’를 다시 꺼내들어 정국안정을 도모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내각제를 선호하는 한나라당에 “총선에서 제1당이 되면 내각 구성권을 주겠다”는 제의를 통해 국정협조를 이끌어내는 한편 여당의 총선 패배시 따를 노 대통령의 책임론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는 것이 이 방안의 장점. 노 대통령이 총선 승리 전망이 지극히 불투명한 현실을 감안해 ‘차선책’으로 선택해 볼 만한 카드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