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의 심리적 지지선으로 평가되는 1150원선이 깨졌다. 올 들어 첫 거래일인 4일부터 이틀간 24원 급락하며 지난 5일 1140.5원으로 거래를 마쳐 2008년 ‘리먼사태’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한 것이다. 지난 11일에는 1119.8원으로 올 들어 1120원대가 무너지면서 최저치를 다시 한 번 경신했다. 환율이 이처럼 하락세를 보이고 있어 단기적으로 증시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란 전망이다.
지난해 정보기술(IT)과 자동차 등 수출기업이 선전했던 가장 큰 이유가 고환율 덕분이었는데, 환율 하락은 역으로 이들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 또는 이익 측면에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실제 환율 하락이 이슈가 됐던 지난해 5월과 10월에 이들 수출주가 부진했으며, 자동차 관련주인 현대차 등에 외국인과 기관이 동반 매도에 나서는 등 수출주의 약세가 본격화됐다.
최근 환율의 급격한 변동은 글로벌 달러 약세 외에도 역외세력의 원화 매집 현상이라는 투기적 수요까지 겹친 결과이기도 해 금융시장의 불안을 키우고 있다. 지난 연말 대비 달러화에 대한 원화 절상률은 4.0%로 태국(0.6%) 대만(1.1%) 싱가포르(0.5%) 등 다른 아시아권 국가보다 훨씬 높고 호주(3.4%) 뉴질랜드(2.1%) 영국(-0.3%) 유로(0.5%) 등 주요 글로벌 국가들도 웃돌고 있다.
최근 원화 강세는 글로벌 달러 향배와 관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외환시장 관계자는 “미 달러화가 약세이든, 강세이든 원-달러 환율을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주 미 경기지표 호조로 글로벌 달러가 엔화 등에 강세를 보이자 역외 참가자들은 도쿄시장에서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서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팔고 원화를 사는 거래를 하면서 환율을 끌어내렸다.
유가도 상승 속도가 빠르다. 두바이유 가격은 지난 7일 배럴당 80.76달러로 2008년 10월 6일 이후 처음 80달러선을 넘어섰다. 정부의 올해 평균 유가 전망치인 80달러를 이미 넘어선 것이다. 이런 상승세는 경기회복 기대감 속에 달러화의 약세로 석유시장에 자금이 유입된 데다 북반구를 강타한 한파가 요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국제유가는 지난 12월 초와 비교해 20% 가까이 올랐다. 향후 한파가 지속할 경우 난방유 등 석유수요 증대는 유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 우려에도 주가가 오르면서 코스피지수는 1700선 주변에서 크게 밀리지 않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다. 주가는 늘 원화 강세 국면에서 올랐던 것. 실제 1985~1989년 원-달러 환율이 800원대에서 630원대로 내렸지만 코스피지수는 1000선에 도달했고, 2007년 10월 코스피지수가 2000을 넘어선 시점에는 환율이 900원대로 밀렸었다. 당시에도 환율 하락이 증시에 부담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컸지만 주가는 꿋꿋이 올랐다. 게다가 지난해 3월부터 시작된 증시 랠리에서도 원화는 꾸준히 강세를 보였다.
일반적으로 달러 공급이 늘어나 한국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구하기 쉬워지면 달러 가치는 떨어지고 원화의 상대 가치는 높아진다. 최근 원-달러 환율 하락은 경상수지 흑자와 외국인 투자자의 주식과 채권의 매수세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주식시장에는 호재지 결코 악재는 아니다. 물론 원화 가치 절상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면 수출 경쟁력을 악화시켜 경상수지 흑자 규모를 줄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주가와 환율의 선후 관계를 따져보면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줄어들어 원화가 약세를 나타내는 시점에서 주가도 조정을 받기 시작했다. 원화 강세가 지나치게 빠르게 진행되면 주가가 일시적이고 마찰적인 조정을 나타낼 수도 있겠지만 큰 방향은 주가와 자국 통화 가치가 함께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환율 하락, 즉 원화 강세는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건강하다는 점을 반영하기에 증시에 긍정적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원화 강세는 통상 외환 수급 측면에서 무역수지나 자본수지 흑자가 확대됐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삼성증권에 따르면 2000년 1월 이후 월간 환율 변동률과 월간 코스피 변동률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미국 달러화에 대한 환율과 코스피 간 상관계수가 -0.35, 유로화는 -0.25, 일본 엔화는 -0.32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 원-달러 환율이 내려가면 코스피지수가 올라가곤 했다는 것으로, 유로화와 엔화에 대해서도 코스피지수는 마찬가지의 움직임을 보였다.
김학균 SK증권 투자전략팀장은 “환율이나 주가 모두 한 국가의 경제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지표”라며 “원화가 강세를 보인다는 것은 무역수지와 자본수지 흑자가 늘어난다는 것으로 국가 경제 전반이 매우 탄탄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주식시장이 강세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구희진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외국인들이 주로 투자했던 수출 관련 종목들의 주가가 낮아진 환율 때문에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환율이 하락하면 달러화로 투자한 외국인 입장에서는 환차익을 얻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증시 전문가들은 국내 경기가 비교적 양호하고 주가 수준이 낮아 외국인 매수세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부분 전망하고 있다. 달러화로 환산한 코스피지수가 본래 코스피지수와 달리 지난해 9월의 전고점을 이미 넘어선 점 역시 외국인들이 국내 증시에 대해 여전히 긍정적 시각을 견지할 수 있는 요인이다.
최근 원-달러 환율 급락에 하락세를 보인 IT 업종이 환율 요인에도 점진적 상승이 예상된다는 전망에 반등했다. 이는 환율 급락만 진정되면 전반적으로 주가 상승이 전망된다는 분석이 힘을 얻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환율 외에도 경기, 업체 간 경쟁력 차이 등 IT 수출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많기 때문에 독립 변수로서 환율 하락이 소폭에 그치면 한국 IT실적과 수출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다.
류민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