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왼쪽)과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 ||
현대·기아차그룹은 지난 10일 현대차 주주대표소송에 대해 항소하지 않고 1심 판결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지난 2008년 5월 경제개혁연대 등 현대차 주주 15명은 정몽구 회장과 김동진 전 부회장을 상대로 ‘현대차가 현대우주항공과 현대강관 등 부실 계열사들의 유상증자에 참여했다가 입은 손실 1445억 원을 정 회장과 김 전 부회장이 현대차에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결정권자였던 정 회장과 김 전 부회장이 현대차에 피해를 입혔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지난 2월 8일, 1심 재판부는 ‘정 회장이 700억 원을 배상하라’는 내용의 원고 일부승소판결을 내렸다.
장기화될 것으로 여겨졌던 이 재판은 정 회장 측이 ‘1심 판결을 받아들이겠다’는 항소 포기 결단을 내리면서 일단락됐다. 1심 판결로 나온 배상액이 부당하다는 판단하에 항소 의사를 밝혀온 경제개혁연대도 현대차의 1심 결과 수용 소식에 항소를 포기한다고 밝혔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1심 판결 이전까지 현대차 측에선 경제개혁연대를 상대로 어떠한 접촉도 해오지 않았다”며 “1심 판결이 나오자 현대차에서 경제개혁연대와 대화 창구를 열고 정 회장의 700억 원 배상액 수용 입장을 알려오면서 경제개혁연대 역시 대승적 차원에서 항소 포기를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경제개혁연대는 현대우주항공·현대강관 관련 소송과 더불어 글로비스 주주대표소송도 진행해 왔다. 지난 2001년 글로비스 설립 당시 출자지분을 현대차 대신 정 회장과 외아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인수했는데 이후 그룹 차원의 글로비스 밀어주기가 진행되면서 결국 정 회장 부자가 부당이익을 취했다는 취지의 소송이다. 소송 제기 당시 경제개혁연대가 주장한 배상액은 약 4000억 원. 그러나 글로비스 상장 이후 주가상승을 고려해 현대차에 대한 정 회장 측의 배상액을 더욱 늘려야 한다는 것이 경제개혁연대의 입장이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아직 글로비스 소송에 대해선 법원 판결이 나온 것도 아니고 현대차 측에서 어떤 반응도 내놓지 않은 상태”라며 “현대차 측에서 지배구조 개선 의지를 갖고 대화를 제안해오면 기꺼이 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글로비스 건은 원래 현대차가 챙겨야 할 수익을 대주주들(정몽구-정의선 부자)이 가져간 것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것이기에 문제 해결을 위해선 정 회장 측의 지배구조 개선 의지가 수반돼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도 현대차가 이번 현대강관·현대우주항공 소송 항소 포기를 계기로 지배구조 개선 작업에 적극 나설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12일 현재까지 현대차 측은 현대강관·현대우주항공 관련 소송 항소 포기와 관련해 어떠한 공식 입장도 내놓지 않은 상태다. 다만 재계 일각에서 “재판이 길어지는 게 그룹이 보탬이 안 된다는 판단에 정 회장이 결단을 내린 것 같다”는 관측을 내놓을 뿐이다. 경제개혁연대가 소송을 통해 제기한 금액의 절반만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온 만큼 재판이 장기화돼도 더 큰 실익을 볼 수 없다는 내부 판단이 섰을 것으로 풀이되는 것이다.
현대차와 경제개혁연대의 쌍방 항소 포기로 볼 때 아직 진행 중인 글로비스 소송 역시 정 회장 측이 재판으로 끝을 보려 하기보다는 재판부와 경제개혁연대를 상대로 타협 절차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경제개혁연대가 기대하는 것처럼 지배구조 개선 논의가 이뤄질 수 있을지에 대해선 불투명한 상황이다. 지배구조 변화 여부와 관련해 현대차 측에선 공식적으로 “구체적으로 논의된 바 없다”는 입장이다.
이번 현대강관·현대우주항공 관련 소송 항소 포기가 시민단체가 원하는 지배구조 개선 논의에 대한 약속을 뜻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 현대차 내부에서도 “현재 상태에서 지주회사제 전환은 무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라고 전해진다. 현대·기아차그룹은 현재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차’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지난 2008년 현대모비스가 현대제철이 보유했던 현대차 지분을 사들이면서 현대모비스를 중심으로 한 지주회사제 전환 가능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현대모비스를 지주사로 삼는 지주회사제 전환을 고려할 경우 정몽구 회장의 아들 정의선 부회장이 현대모비스의 최대주주가 돼야 경영권 승계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현대모비스 지분이 하나도 없는 정 부회장이 현대모비스 지분 10%를 확보하는 데만 약 1조 4074억 원이 들 전망이다(11일 현대모비스 종가 14만 4500원 기준).
정 부회장이 그동안 그의 실탄창고로 평가받아온 글로비스 지분 처분을 통해 현대모비스 지분 획득에 나설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정 부회장은 현재 글로비스 지분 31.88%(1195만 4460주)를 보유하고 있다. 이를 11일 글로비스 종가 10만 500원으로 환산하면 약 1조 2024억 원이 된다. 수치상으로만 놓고 보면 글로비스 지분 처분을 통한 정 부회장의 현대모비스 대주주 입성은 가능한 셈이다.
그러나 정 부회장 명의 글로비스 지분 중 일부는 현재 은행권에 담보로 잡혀 있는 상태다.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 비자금 사건 이후 재판과정에서 8000억 원 사회 환원을 약속했는데 현재까지 1500억 원 출연에 그쳐 있다는 점도 걸린다. 아직 사회 환원 약속 이행을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후계 굳히기에 거액을 먼저 쏟아 넣을 경우 발생할 여론 악화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셈이다.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이번에 법원에서 판결한 배상액 700억 원은 어차피 회사(현대차)로 들어가는 돈이기에 정 회장이 회사를 위한 ‘통 큰 결단’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수십 배 큰돈이 들어가야 할 지배구조 개선 작업에 정 회장이 선뜻 나설 가능성은 현재로선 높지 않다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