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장엽씨가 망명 당시 관계당국에 진술한 친북 활동인사들의 명단, ‘황장엽 리스트’가 송두율 교수 조사과정에서 ‘괴력’을 발휘하자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지난 7월4일 국회에서 열린 북한인권문제 토론회에서 발표하고 있는 황씨. | ||
지난 97년 2월 중국에서 한국행 망명길을 택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는 이른바 ‘황장엽 리스트’에 대한 논란이 거세던 그해 7월 이렇게 털어놨다. 암암리에 북한과 연계를 가지면서 친북활동을 해온 인사들을 지목하는 리스트가 사실상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언급이다. 누구, 누구 하는 식의 명단을 적어 내거나 그런 목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활동내용을 우리 관계당국에 죄다 말해줌으로써 리스트가 만들어졌을 것임을 내비친 것이다.
실재 여부를 두고 설왕설래하던 바로 그 ‘황장엽 리스트’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지난 9월22일 입국한 재독학자 송두율씨가 30여 년간 북한 노동당원으로 암약해 왔으며 그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거물급 예우를 받아왔음이 국가정보원의 수사결과 드러났기 때문이다.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송씨는 북한으로부터 거액의 달러를 정기적으로 받고 북한을 수시로 드나들며 노동당의 대남공작 수행에 상당한 역할을 해왔다는 게 정보당국의 판단이다.
이런 송씨의 혐의 내용은 이미 황장엽씨가 망명 직후 수차례 언급해온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 송씨가 황장엽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완강하게 부인하는 바람에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묻혀졌지만 그렇다고 황장엽 리스트가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니다.
정보 당국의 한 관계자는 “황씨가 망명 직후 국정원 조사과정에서 확인해주거나 진술한 정보는 그동안 우리 정보기관이 축적한 대북정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며 “그가 언급한 인적 정보, 특히 대남공작과 관련한 대목을 접하고도 당시 안기부가 이를 그냥 지나쳤으리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번에 귀국한 송씨를 대상으로 한 수사를 통해 국정원은 황씨의 언급 내용과 소위 ‘황 리스트’에 대한 비교적 구체적인 정보를 보완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국정원의 수사내용 중 언론에 공개된 노동당 입당이나 정치국 후보위원 관련 사안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증거가 갖춰져 있어 입증이나 송씨의 자백을 받아내는 데 어려움이 없던 것으로 안다”며 “국정원 대공파트에서 진짜 관심을 갖고 주력한 부분은 황장엽씨가 말했던 친북인사와 관련된 사안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일각에서는 황장엽 리스트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황씨가 노동당의 국제담당 비서를 지내 극비사안인 대남공작과는 거리가 있다는 측면에서다. 또 그가 북한 체제를 등진 망명자 신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남측에서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안을 부풀려 전달했다는 주장이다.
▲ 지난 2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송두율 교수.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실제 황씨는 국정원 조사 과정에서 “김용순 노동당 대남비서가 나에게 ‘송두율을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려놨더니 아주 건방져져서 우리 통일일꾼들의 말도 잘 안 듣는다고 밑에서 불평이 많다’고 말하더라”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황장엽 리스트의 부활 움직임과 관련해 검찰은 가능성을 일축하면서 말을 아끼고 있다. 검찰은 송씨의 수사와 관련해 일각에서 ‘국내 연계세력 수사’ 등의 관측이 나돌자 “그럴 계획은 없다”고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송씨에 대한 수사가 송씨 본인의 친북행적과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의 활동 등에만 국한해 이뤄질 것임을 언급한 것이다. 국정원측에서 이첩한 수사상황과 관련해 사실 여부를 보완수사를 통해 확인하고 기소여부 등 사법처리 절차를 밟아나가는 것이지 다른 쪽으로 수사의 가지를 치거나 확대하지는 않겠다는 게 검찰의 입장인 듯하다.
하지만 국정원의 내부 움직임은 검찰과 상당한 온도 차를 느끼게 한다. 한 관계자는 “국정원이 확보한 황장엽 리스트와 관련한 사안이나 송씨의 수사과정에서 확인한 남한 내 연계세력 대목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며 “이런 사안을 검찰에까지 내돌릴 수 있겠느냐”고 설명했다. 검찰로서는 이런 정보에 대해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얘기다.
국정원으로서도 황장엽 리스트는 금방 꺼내놓거나 흔들어 댈 카드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향후 남북간의 치열한 정보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유용한 카드가 그득하기 때문이다. 지난 37년간 막대한 정보인력과 자금을 동원해 송씨를 밀착 감시해 옴으로써 ‘송두율=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혐의사실을 밝혀낸 과정을 되짚어보면 국가정보기관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북한의 대남공작망이나 해외교포를 통한 우회침투 조직의 퍼즐을 한 조각 한 조각 맞춰가기 위해서는 이런 결정적인 정보들을 축적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수사 관계자의 말이다. 남북간의 치열한 첩보전쟁에서는 서로 상대방의 카드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카드가 무엇인지를 노출시키지 않는 것도 못지 않게 긴요하다는 것.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황장엽 리스트가 향후 어떤 방향으로 튀어나오게 될지와 관련해 의미있는 말을 던졌다. 그는 “황장엽씨가 송씨와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이번 조사과정에서 파악됐다”며 “황씨가 그동안 언급해온 송두율 관련 사안뿐 아니라 북한의 대남공작 등과 관련한 진술내용을 다시 원점에서부터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경우에 따라 그동안 놓쳤거나 그냥 넘겨버렸던 문제들이 새롭게 불거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황씨가 관계당국에 언급한 내용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극비파일은 이제 진위여부를 둘러싼 논란을 넘어 어떤 내용이며 어느 방향으로 튈지가 관심거리로 떠오르고 있는 형국이다. 송두율 수사는 황장엽 리스트라는 뇌관과 함께 뚜껑이 열리게 될 판도라의 상자가 분명하다고 핵심 정보 관계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진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