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기업들이 연봉제를 실시하는 요즘, 협상의 노하우에 목마른 직장인들이 많다. 입사 직후나 신입 시절에는 대부분 회사 측이 정해주는 대로 끌려가게 마련. 다음 협상까지 이를 갈며 여기저기서 협상 노하우를 갈무리하는 이들은 초보 때의 경험을 잊지 못한다. 시각 디자이너 K 씨(여·25)는 입사 후 처음 연봉계약을 할 때 회사 측으로부터 능력제로 모두가 다른 금액이니 비밀을 지켜줄 것을 요구받았다.
“다들 같은 소리를 듣고 입사했으니 동기들끼리 깔깔대며 웃고 얘기하다가도 연봉이 화제가 되면 슬쩍 자리를 피하거나 서로 쉬쉬하는 분위기였어요. 능력제라 은근히 경쟁하는 분위기도 있었죠. 정말 죽자고 일했죠. 지각, 결근은 당연히 없고 디자인 시안도 기본의 네댓 배 되는 양을 소화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저를 포함해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동기들 모두 허탈한 순간을 맞이했어요. 비밀을 터놓고 보니 연봉은 이미 연차별로 정해져 있어서 동기 모두 같았던 거죠.”
K 씨는 “그렇게 무리해서 일을 했는데 배신감마저 느꼈던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L 씨(여·28)도 신입 시절 당황스러웠던 협상 경험을 갖고 있다. 회계 관련 회사에 근무하던 그는 사장과의 첫 협상에서 무안한 일을 겪었다.
“원래 학벌 좋고 똑똑하기로 소문난 분이었어요. 젊은 나이에 패기 하나로 창업하셨고 나이답지 않게 사람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죠. 입사하고 처음 연봉협상을 하러 사장실에 들어갔는데 너무 긴장이 되는 거예요. 나름대로 심리전에서 말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관련 글을 수차례 보고 갔는데도 제가 했던 말은 ‘네’밖에 없었죠. 짧았던 협상 뒤에 사장님이 저한테 ‘○○씨, 순진하네. 연봉을 더 낮게 해도 가능하겠어. 다음에는 초보 티 좀 벗어 봐요’라고 하시더군요. 순간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연봉은 제 능력과 연차에 맞게 적당히 해주셨는데 사장님이 양심적이라는 생각보다는 ‘나 참 못났네’ 하는 생각만 들었던 시절이었어요.”
어리바리했던 사회 초년병 시절을 지나면 이제 슬슬 협상 자체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꾀를 내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의 노선을 택해 행동한다. 의류 원단 제작사에 근무하는 C 씨(여·30)는 ‘무협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매년 5%씩 인상이에요. 더 이상의 가감은 없죠. 다들 그렇게 알고 협상 시즌이 되면 으레 하던 것처럼 계약서 갱신을 위한 도장만 찍고 나옵니다. 여기에 반발한다는 것은 곧 퇴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2차 선택을 마련해 놓지 않는 이상 별다른 이의 없이 넘어가고 있어요. 패턴 디자인 파트 외에는 단순 업무가 주를 이루는 상황에서 회사에서도 미련이 없을 거예요. 현재 회사의 연봉 책정에 만족하는 건 아니지만 몸값을 높여서 이직한다고 해도 업무강도가 높아지는 건 불가피하지 않겠어요? 사실상 모험을 하기에는 나이가 걸리기도 하고요.”
C 씨와 달리 Y 씨(29)는 모험을 감행했다. 유통회사에서 일하는 그는 다른 업계에서 이직해온 데다 관련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첫 번째 연봉협상에서 실패한 경험을 갖고 있어 재계약에 임하는 자세가 남달랐다.
“전 직장 경력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던 첫 번째 협상에서 물먹었단 생각에 1년 내내 쓰린 가슴으로 일했습니다. 불만이었지만 꼬투리 잡힐 일은 하지 않았어요. 연봉협상 시즌이 다가와서 과감하게 실장님한테 사표를 제출하고 나왔습니다. 사실 그렇게 행동했어도 사흘 정도 쉬면서 만감이 교차했는데 다행히 회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고, 그 뒤 연봉협상에 들어가서 제가 예상했던 연봉으로 확정지었습니다. 일단 붙잡아 주니 기분은 좋은데 마음 한 구석으로는 불안함도 없지 않아요. 우선 잡았지만 저 모르게 다른 사람을 구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내년에는 또 회사가 선수를 칠 수도 있잖아요.”
Y 씨는 연봉계약에 동의하고 일하고 있지만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다. 그는 “항시 제출할 수 있는 이력서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IT기업 개발자로 직장생활 5년차에 접어드는 M 씨(33)는 사표부터 제출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협상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그는 무턱대고 높은 연봉을 부르지도 않는다.
“업계에 있다 보면 경영진이 터무니없이 싼 몸값으로 전문 개발자를 구할 때도 있어요. 조용히 일하는 개발자들은 말도 잘 못하고 다루기 쉽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럴 때마다 참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심지어 저보다 개발 실력은 뛰어나도 연봉이 낮은 경우를 봐요. 저는 일단 기죽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심리에 관한 공부도 꾸준히 하면서 인간관계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이직도 염두에 둬야 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상황에 적절한 인재를 주위에 소개할 수 있는 것도 일종의 능력이니까요. 협상 때 경영진에게 보여줄 객관적인 수치의 자료도 준비합니다. 그리고 소위 ‘말발’이라고 하죠. 어려운 개발 프로그램을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능력도 길러야 해요.”
경력을 포장하는 것도 협상의 기술 중 하나다. 그래픽 업체에서 일하는 O 씨(34)는 이직 때 부풀린 경력으로 조바심 내는 후배의 고민을 명쾌하게 해결해 줬다고.
“이직에 성공했는데 전 직장에서의 직급과 급여를 부풀린 것 때문에 고민하더라고요. 회사 입장에서는 연말 소득공제 때문에 원천징수영수증 등을 요청하다보면 전 직장의 급여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연봉 협상에서 회사가 제시할 수 있는 선을 통과했기 때문에 이직이 무난했던 거예요. 채용됐으니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는 소리죠. 이런 것도 협상의 스킬이라고 생각합니다. 적당한 포장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일 수 있잖아요.”
요식업체에 오래 근무한 H 씨(38)는 노련한 협상가다. 직접 매장을 운영해 본 적도 있어 갑과 을 양쪽 입장에 모두 정통한 편이다. 그는 채용하는 쪽 입장에서는 실제 주고 있는 연봉보다 낮게 부르는 게 일반적이니 당황하지 말고 일단 여유를 보이라고 조언한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거나 말을 더듬는 등 밀리는 모습을 보이면 상대방이 우습게 봅니다. 본인의 장점과 차별성만 요점 있게 말하고 자신감 있는 태도를 유지하는 게 핵심이죠.”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