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규군 아버지 김현도씨와 찬인군 할머니 김말순씨 | ||
9월 28일 오전 9시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 마을. 아침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찬인이네 집을 찾은 영규군 아버지 김현도씨(56)는 방에 앉자마자 장탄식을 했다.
찬인이네 집 안방 낡은 티크장에는 누렇게 색이 바랜 ‘개구리 소년’ 전단지 한 장이 붙어있었다. 맞은 편 벽에는 전단지에 실린 찬인이 얼굴의 원본 사진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나도 집에 오니까 다 거짓말 같아. 어딘가 살아 있겠지 믿고 있을 때는 차라리 희망이라도 있었지. 이제 다 끝났잖아.”
지난 이틀 동안 밀려온 믿을 수 없는 절망감. 찬인군 할머니 김말순씨(77)는 지난 11년의 야속한 기다림을 차라리 막연한 희망으로 되새겼다. 아들 내외가 섬유공장에 나간 하루 내내, 밥 한 그릇을 혼자 먹어도 자꾸만 대문이 돌아봐지는 11년이었다.
“밥을 먹을 때면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는데… ‘찬인아, 할매가 밥 먹고 깜빡 잠들어도 밥 먹으러 들어 온나, 얼른 밥 먹으러 온나잉’….”
하지만 손자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흙더미 속의 유골이 되어 돌아왔다. 유골이 발견된 지난달 26일, ‘개구리 소년’을 처음으로 확인시켜 준 단서는 얄궂게도 손자의 체육복이었다.
‘상인’이라는 학교 마크가 찍힌 학교 체육복. ‘상인’은 찬인군이 성서초등학교로 전학오기 전에 다니던 학교 이름이었다. 유골 발굴 이틀째인 27일, 타살 의혹의 단서로 발견돼 가족들의 가슴을 다시 한 번 쥐어뜯게 한 건 영규군의 체육복이었다.
“맞아예, 그거. (실종) 이틀 전이었는데… 일요일날 보니까 영규가 두터운 겨울 체육복을 입고 놀길래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7천원 주고 얇은 거 사줬지예.”
산 지 하루밖에 안된 새 체육복은 뒤집히고 양팔이 묶인 채 흙더미 속에 처박혀 있었다.
“영규는 참 똘똘한 애였어요. 길가다 공중전화에 동전이 남아 있으면 아빠한테 전화를 하곤 했습니다. 여덟 살 때부터 그랬어요.”
김현도씨는 아들의 모습이 새삼 떠오르는 듯 조금은 밝아진 표정이었다.
“왜 안그랬나. 우리 아(이)는 촌놈에 쑥맥이었지. 순하디 순해 갖고….”
찬인이가 아홉 살이었던 어느 날, 대구 시내에서 놀러 온 이웃집 친척아이들과 어울려 논 적이 있었다. 찬인이 할머니는 그날 오후 불쑥 대문을 열고 들어와 ‘할매야, 쟤들이 나한테 촌놈, 쑥맥이라고 놀렸다’며 울상이 된 얼굴로 품에 안겨오던 순둥이 손자의 모습이 “징그럽게 선하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지난 11년 동안 닳고 해지도록 주고받았을 아이들 얘기를 들으면서 김현도씨는 어제 일처럼 안타까운 듯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말문을 이어가던 김씨의 얼굴이 어느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욕설이 튀어 나왔다.
▲ 지난달 28일 박찬인군 집에 모인 유족들. 왼쪽부터 영규군 아버지 김현도씨,찬인군 할머니 김말순씨, 찬인군 어머니 김인자씨 | ||
유골이 발견된 뒤 사고 당시 초동 수사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경찰은 당시의 첫 수사가 사고 당일 즉각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날 저녁 7시에 인근 파출소 경찰관 15명이 출동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씨는 동네 사람들 40여 명이 밤새 산을 뒤지고 난 다음날 아침에야 경찰이 왔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온 경찰들이 뭐라는 줄 압니까? 가출이라는 겁니다. 결손 가정 아이들이라나. 부모들 멀쩡히 있는 애들을….”
옆에서 영규 아버지와 시어머니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찬인이 어머니 김인자씨(31)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찬인이는 제 자식이었어요. 한 번도 다른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요.”
김씨는 찬인이가 일곱 살 때 찬인이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아버지 박씨가 전처와 이혼을 하고난 5년 뒤였다. 그때 나이 열일곱. 찬인이에게는 열 살 많은 엄마였다.
당시 경찰이 가출로 추정했던 이유는 새어머니 김씨가 찬인이를 못살게 굴었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시어머니가 거들었다.
“우리 아(이)가 엄마를 얼마나 잘 따랐는데. 친엄마였지, 친엄마.”
아무 것도 모르던 일곱 살 찬인이는 김씨를 처음엔 ‘고모야, 고모야’하며 따라다녔다고 한다.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아홉 살 때부터. 살아있었으면 스무 살이 되었을 찬인이에게 ‘엄마’라는 존재와 함께 한 기억은 1년도 채 안되는 셈이다.
“실종 이틀 전이었어요. 일요일이었는데 찬인이가 통닭을 사 달라고 졸랐어요. 그때는 공장 문을 연 지 8개월 밖에 안됐을 때였죠. 통닭 한 마리 맘놓고 먹기 어려운 형편이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무슨 돈이라도 해서 사 줬을 텐데. 사고나고 그게 두고두고 마음 아팠어요.”
김씨는 끝내 눈가에서 눈물을 닦아냈다. 결국, ‘결손 가정’이라는 경찰의 오판은 수사 방향을 틀어놓은 채 유가족의 가슴에 못질만 하고 말았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일부 경찰의 ‘못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산 속을 수색하던 한 경찰이 가족들에게 ‘목이 마르니 산밑에 내려가서 물이나 떠오라’는 황당한 심부름을 시켰기 때문이다.
“자식 잃고 눈 뒤집힌 부모들에게 그게 할 소립니까.”
김씨는 ‘세상에 이런 경찰…’을 한번 더 되뇌었다. 그렇게 두 배의 눈물을 쏟으며 시작된 ‘개구리 소년 추적기’는 그 뒤로 많은 시민들의 격려로 힘을 받기도 했다.
사고가 있은 이듬해는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해.
가족들은 서울에 올라가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후보들을 만나기도 했다. ‘개구리 소년’의 사회적 충격이 채 다 가시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정치인이 불러서 간 건 아니지만 면담 요청을 해서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영규 아버지 김씨가 그때 이후로 알게된 것은 이 두 정치인의 금일봉 액수가 똑같이 1백만원이라는 것뿐이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잘 안난다’던 김씨는 그나마 기억에 남는 정치인으로 김대중 후보와의 만남을 꼽았다.
“참 해괴망칙한 일이라고 하시더군요. 경찰인원이 부족하면 군인까지 동원해서 찾아주겠다고 했었어요.”
물론 김대중 후보는 그로부터 5년 뒤에나 국군 통수권을 갖게 됐지만 그때는 이미 개구리 소년들이 세간의 기억 속에서 묻혀지고 난 뒤였다. 더구나 유골 현장에서 총탄이 발견된 뒤 인근에 위치했던 군부대측이 당시 사격장의 정확한 위치조차 경찰에 알려주지 않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 같은 약속은 더욱 격세지감으로 다가온다.
유골이 발견된 시각은 9월26일 오전 11시30분께. 10분 뒤에 파출소 직원 4명, 달서경찰서 형사계 직원들이 왔고 그로부터 1시간 뒤에는 달서경찰서장과 형사과장이 왔다. 그로부터 두 시간 동안에는 대구지방경찰청 강력•폭력계장이 현장을 지휘하다가 지방경찰청장이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결국 유가족들에게 전화연락이 온 것은 오후 5시쯤. 현장에 도착한 유가족들 앞에는 유골 4구가 신발, 옷가지와 함께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자기들끼리 들쑤셔 놓고 필요할 때만 가족을 부릅니까. 그 전에 나온 유골에 다른 단서가 없다는 것을 누가 증명합니까. 경찰들이 나란히 정리해 놓은 유품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고 왜 유가족들이 지켜보는 데서는 탄환이 10발이나 나오는 겁니까. 경찰을 다시 믿어야 합니까.”
김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기자회견을 준비중이다. 경찰 수사를 지켜 본 뒤 수사의 잘못된 점을 91년 당시부터 조목조목 반박할 생각이다. ‘타살’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는 가족들은, 미궁 속의 살인범에 대해서는 의외의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찬인이 어머니 김씨의 얘기. “27일 낮에 엄마들끼리 점심을 먹으면서 의견을 모았어요. 범인이 자수를 한다면 용서를 해주기로. 반대하는 분은 한 분도 없었습니다. 다만 이제라도 왜 그랬는지 그것만이라도 밝혀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구요. 엄마들은 같은 마음이에요.”
유가족들은 또 아이들 화장이나 장지(葬地)에 대해서 논의하기 위해 대책위원회를 꾸릴 계획이다. 내부적으로는 다섯 아이들을 함께 화장을 하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다.
김현도씨는 “경찰이야 시신을 가리는 게 중요할지 몰라도 우리는 내 아이, 네 아이 가려내는 게 더 이상 별 의미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 한맺힌 영혼을 어떻게 풀어야할지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젭니다”라고 말했다. 두 부모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김말순 할머니는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태운 재를 밥에 섞어서 산에 뿌리면 좋다더라. 산새들이 그 밥 먹고 나서 좋은 데에 똥을 누면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간다더라. 마음 편한 곳으로 가야지. 우리 애들… 이승에 맺힌 원한이라도 풀 수 있는 곳으로….”할머니는 얘기를 끝맺지 못했다. 그리고는 지난 11년간 쏟아내고도 남은 눈물을 다시 한번 조용히 찍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