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26일 오후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와 회담을 갖기 위해 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비자금 정국으로 코너에 몰린 최 대표는 이날 ‘특검’ 으로 정면돌파 의지를 보였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폭탄발언이 있기 일주일 전인 지난 10월4일 청와대의 한 386 참모가 내뱉은 말이다. 그는 실타래처럼 얽힌 국정현안에 대해 속시원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한숨만 길게 내쉴 뿐이었다. 하지만 불과 20여 일 뒤 ‘전세’는 역전됐다. 한나라당의 한 핵심당직자는 SK 비자금과 관련한 긴급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대선자금에 대한 검찰의 전방위 수사가 진행되면 정치권에 무서운 빅뱅이 휘몰아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편 그동안 한숨소리만 내던 청와대는 “SK 비자금은 한나라당이 더했으면 더했지, (여권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느긋해하고 있다. 뒤늦게 사태 심각성을 인식한 최병렬 대표는 특검에 모든 것을 걸고 노 대통령에게로 기울어진 정국의 추를 자신에게 되돌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어떻게 상황이 이렇게 급반전된 것일까.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귀신에 홀린 것 같다’며 현재의 대선자금 정국을 우려하고 있다. 과연 노 대통령은 언제부터 야당의 엄청난 포화 속에서도 묵묵히 칼을 갈고 있었을까. 새 정치를 외쳐온 노 대통령이 정치판을 갈아엎기 위해 오랫동안 ‘작품’을 다듬어온 것은 아닐까. 정가에서 흘러나오는 ‘노무현 연출’의 ‘빅뱅 시나리오’를 따라가 봤다.
먼저 야당에서 주장하고 있는 시나리오 얼개를 들어보자. 한나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노 대통령의 ‘사전 기획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미 오래 전부터 SK 비자금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도술 전 비서관과 최돈웅 의원이 이 사건에 함께 연루돼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그 경중을 따져본 결과 한나라당의 비리가 최 전 비서관에 비해 더 심각하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그래서 일부 측근들의 출혈을 각오하고 두 가지 사안을 동시에 까버린 것이다. 정치자금 문제에 치를 떨고 있는 국민들의 지지를 기대하면서.”
한나라당의 또 다른 의원도 “청와대가 최도술씨 비리뿐만 아니라 한나라당의 아킬레스건을 이미 파악한 뒤 치밀한 기획에 따라 정국을 주도해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언뜻 보기에는 재신임 정국과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가 다른 바퀴로 굴러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청와대와 검찰의 암묵적인 교감에 따라 예정된 코스를 밟아왔을 수 있다”는 추측이다.
여의도연구소장인 윤여준 의원 역시 지난 10월10일 노 대통령의 재신임 기자회견 직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이 난국을) 돌파하는 카드를 2∼3개쯤 갖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노 대통령은 반드시 정치개혁으로 초점을 옮겨갈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이 들어맞고 있다. 정병국 의원도 “노 대통령은 이미 정권 초기 SK 수사가 진행되면서 각 당의 돈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를 이용해 정국의 큰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김영환 의원은 “처음 검찰이 최도술의 11억원을 밝혀냈을 때 정말 제대로 수사하는가 생각했는데 이후 전개과정을 보니 결국 정치권을 휘젓기 위한 포석이었다”면서 “한나라당의 뼈대를 자르기 위해 자신의 살점을 일부 떼어낸 것 아니겠느냐”며 여권 핵심부의 ‘사전 기획설’을 설명했다.
▲ 정치개혁을 명분으로 ‘총’을 든 노무현 대통령의 시도는 성공할 것인가. 사진은 후보시절 군부대 를 방문한 노 대통령. | ||
먼저 3~4월 인지설이 있다. 지난 2월21일 검찰은 SK그룹 차원의 로비내역이 담긴 비밀장부를 발견한 바 있다. 방대한 양의 이 비밀장부에는 SK 그룹 차원의 로비내역도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검찰은 “정밀 검토를 거쳐 범죄 혐의가 있는 것으로 보이면 수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제난이라는 표면적인 ‘벽’에 부닥친 검찰은 이에 대한 수사 착수를 차일피일 미뤄왔고 비밀장부의 구체적인 내용은 현재도 알려진 게 없다.
그런데 정가 일각에선 이때 이미 검찰이 SK의 비자금 윤곽을 파악한 뒤 비공식 루트를 통해 대통령에게도 대강의 보고서를 올렸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SK 비밀장부가 발견되고 얼마 안 있어 노 대통령은 검찰의 SK 수사에 대해 “사정 활동의 속도조절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서 국민 불안감을 조성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며 처음으로 ‘사정조절론’을 외쳤다. 뒤이어 3월10일 노 대통령과 검사들과의 대화에서 이석환 검사가 “SK그룹 수사 과정에서 여당 중진과 정부 고위관계자로부터 외압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해 파문이 일었다.
이와 관련해 최근 홍준표 의원은 “SK 비자금 건만 해도 이상수 총장이 수사중에 검찰에 압력성 전화를 하고 대통령이 ‘속도 조절론’을 말한 배경도 다 조사해야 한다”며 대통령이 SK 비자금 문제를 이미 깊숙이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두 번째 사전인지 가능성이 있는 시기는 지난 7월 중순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 7월21일 특별기자회견을 가진 자리에서 “대선자금 문제가 국민적 의혹으로 제기된 이상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고 여야 모두 투명하게 밝히고 가야 한다”고 밝혔다. 당시 민주당 정대철 대표의 2백억원 모금 발언 파문으로 정국의 추가 대선자금 문제로 쏠리자 “여야 동시 공개”의 승부수를 띄웠던 것이다.
이것은 노 대통령이 대선자금에 대한 나름대로의 자신감이 없으면 쉽게 내놓을 수 없는 카드였다. 그런 이유로 정가 일각에선 이미 당시 노 대통령이 SK 비자금의 한나라당 유입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때 노 대통령이 대선자금의 철저한 검증을 위해서는 특검도 마다하지 않는 등 적극적인 입장을 보인 것도 이를 뒷받침하는 부분이라는 것.
하지만 당시 야당은 노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때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대선자금 공개 발언 의도가 대선자금 수사를 매개로 궁극적으로 정치권 전체의 ‘빅뱅’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지금과 너무나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는 상황 예견이었다. 결국 당시 야당의 극렬한 반발에 부딪혀 ‘정치판 뒤엎기’에 실패한 노 대통령이 최근 재신임 정국을 유도하며 다시 한번 ‘뒤집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마지막으로 노 대통령이 지난 8월10일 이전에 야당의 대선자금 전모를 파악했을 가능성도 있다. 바로 노 대통령의 재신임 정국을 직접 유발하게 한 최도술 전 비서관의 SK 자금 수수 사실을 이 즈음에 노 대통령이 파악했을 것으로 보는 관측 때문이다.
최씨의 말에 따르면 그는 지난 8월11일 처음으로 노 대통령에게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이때 그는 노 대통령을 찾아가 ‘비서관직에서 물러나 17대 총선에 출마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최 전 비서관의 ‘변명’일 수도 있다. 일부의 시각대로 ‘SK 자금 수수와 관련한 비리가 드러나자 최씨가 청와대 핵심부로부터 사퇴를 종용받았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노 대통령 또는 청와대 핵심부는 이때 이미 최씨의 비리 혐의를 포착하고 있었던 셈이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은 처음에 최도술 문제를 지난 9월3일 노 대통령에게 직보했다고 말했다가 나중에 다시 ‘9월10일이나 11일’ 그리고 또 다시 ‘20일경’으로 말하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다. 법무부 장관의 대통령 직보가 흔하지 않은 일임을 감안하면 정확한 시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 지난 10월9일 SK비자금 관련 기자회견 직후의 최돈웅 의원과 홍사덕 총무. 이종현 기자 | ||
노 대통령의 몇몇 핵심 측근들이 그동안 보여온 내년 총선에 대한 ‘막연한 자신감’도 ‘정치판 갈아엎기’ 사전 기획설에 힘을 보태는 요소다. 이들 핵심 측근들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국정 지지도와는 달리 내년 총선과 관련해 주변에 낙관론을 펼치곤 했다. 충분히 상황 반전이 가능하며 결국 신당이 새 정치의 구심점이 되리라는 예측이었다.
일부 핵심 측근의 낙관론 뒤에 지금과 같은 ‘정치판 갈아엎기’ 그랜드 플랜이 세워져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일각에선 그간 이들이 보여온 ‘막연한’ 자신감이 지금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냐고 의문을 나타내는 이들도 있다.
검찰의 그간 행보도 노 대통령 사전 기획설을 설명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대선자금 수사로 코너에 몰린 한나라당은 ‘검찰과 사전교감 아래 (청와대의) 사전기획이 있었던 것 같다’는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과연 검찰은 노 대통령과 호흡을 맞춰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까. 여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먼저 ‘코드 공유론’.
사실 현재의 청와대는 예전 정권처럼 직접 검찰 수뇌부를 컨트롤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남 출신인 데다 정치적 야심이 별로 없는 송광수 검찰총장과, 노 대통령과 사시 17회 동기인 안대희 중수부장의 ‘송-안’ 라인이 노 정권과 대체로 ‘코드’를 공유해 왔다는 점에서 이 추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검찰 속성상 권력핵심의 뜻을 거스르며 ‘저항’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거의 모든 것은 인사와 출세로 귀결된다.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따라 영전 내지는 좌천의 기로에 선다고 할 때 감히 권력의 뜻을 거스르는 간 큰 검사는 몇 되지 않을 것이다”면서 “현재의 검찰조직도 아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과거의 관행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과 강금실 법무부 장관 등 권력 핵심은 “원칙대로 수사”를 강조하면서 대선자금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대통령의 ‘신임’에 힘을 얻은 검찰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일 없이 여차 하면 다른 대기업에까지 대선자금 수사를 확대할 태세다. 이를 볼 때 ‘청-검’의 ‘같은 노래 부르기’ 추론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노 대통령도 이런 검찰의 우호적인 기류를 읽고 지난 몇 달 전부터 계속 ‘여야 대선자금 전면 공개’의 승부수를 띄웠다는 것이다. 홍준표 의원은 지난 10월26일 기자간담회에서 “뭐, 이런 놈의 검찰이 다 있나”라며 검찰의 수사 방향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한나라당의 검찰에 대한 의식을 기우라고 여기는 해석도 있다. 검찰은 이미 노 정권의 통제를 벗어났고 경우에 따라서는 SK 비자금 수사와 관련해 이회창 전 총재를 비롯해 노 대통령에게까지 수사의 칼날을 들이댈 수도 있다는 ‘섬뜩한’ 추측도 나오고 있다. 검찰이 만약 정권과 ‘같은 노래’만을 연주하고 있다면 송두율씨 구속 수사에서 보는 것과 같은 ‘청-검’ 갈등설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번 재신임 게임에서 노 대통령이 승자가 될 수는 없다. 모든 것은 검찰의 손에 달려 있다고 본다. 당직 생활 20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검찰이 권력의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 아무도 감당하지 못한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태라고 본다”면서 검찰의 향후 행보를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정치개혁을 위해서 정치자금의 투명화가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주장해왔다. 이번 기회에 한국 정치의 악성 종양인 불법 정치자금 관행을 끊으려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야당의 시각대로 이런 정국 흐름이 노 대통령의 ‘벼랑 끝 작전’에서 출발했다면 한국 정치의 시계추는 또 다시 뒤로 돌아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