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통령 안가는 대부분 사라지고 삼청동 안가만이 홀로 남아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궁정동 안가로 유명세를 떨친 안가. 이젠 더 이상 고위급 인사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안가의 현재를 살펴봤다.
“이분은 검찰청 직원이에요. 수사하다가 사고가 생겨 이렇게 됐죠. 잘 부탁드려요.”
지난 5월 서울에 위치한 한 부동산 업소에 검찰 고위급 관계자가 지적장애를 가진 묘령의 여성 A 씨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 검찰 관계자는 부동산 업자에게 “입주 예정인 이 분(A 씨)은 원래 검찰청 직원인데 사건 수사를 하다 크게 다쳤다”는 설명을 덧붙이며 국가 기밀사안인 만큼 철저한 보안을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성 A 씨는 검찰 관계자 옆에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치 부동산 업자에게도 자신의 얼굴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듯이.
6년 전 A 씨는 동네 주민으로부터 수차례 성폭행을 당했다. 검찰은 가해자가 석방되면 지적장애를 가진 A 씨가 또 다시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A 씨에게 사실상 무기한의 안가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안가는 원래 재판 종료까지만 제공되며 일반적으로 1년 계약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A 씨의 사례처럼 협의회를 거쳐 안가 계약을 장기간 연장해온 건 보복범죄가 그만큼 증가했고 보복의 경중도 중해졌기 때문이다.
일례로 14년 전 절도죄로 10개월 복역한 한 남성이 자신을 신고한 인물이 이웃집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해당 여성을 바다에 빠뜨려 살해한 사건이 대표적인 일화다. 가해자가 14년 만에 자기만의 ‘복수’를 한 것이다. 이를 두고 앞서의 검찰 관계자는 “‘14년 만의 보복’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보복범죄는 언제 어디서 이뤄질지 모른다. 때문에 검찰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신고자나 피해자를 장기간 보호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기마다 탄력적으로 피해자들을 또 다른 안가로 이사시켜 보안의 강도를 높이는 건 기본이다. 또한 검찰은 안가로 활용할 수 있는 오피스텔 및 임대 아파트의 수를 점차 늘려 피해자들이 모여 사는 소위 ‘안가촌’이 형성되지 않게 노력한다고 한다. ‘안가촌’이 형성되면 가해자가 손쉽게 피해자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안가’에 입주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007작전’을 방불케 한다. 평소엔 만나기도 힘든 검찰 고위급 관계자가 옆에 달라붙어서 모든 이사과정을 감시하는데 이 과정에 피해자의 가족조차 동석할 수 없다고 한다. 한 검찰 관계자는 “피해자의 가족한테도 안가의 위치를 알리지 않는 게 원칙이다. 나중에 피해자가 소신에 따라 (가족에게) 알릴 순 있다”고 말했다.
모든 이사비용과 보안업체와의 계약비용은 물론 월세, 관리비, 공과금도 검찰의 몫이다. 지역별로 다르지만 서울 소재 오피스텔 임차 기준으로 안가에 입소하는 피해자에게 지급되는 월 금액(월세·공과금)은 약 70만~90만 원선.
이처럼 치밀한 보안작전에 피해자들의 안전이 이전보다 강화된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전히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익명을 요구한 B 전직 지검장은 “아무리 보안을 유지한다 한들 한국에선 안가가 ‘불안전’ 가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안가에 피해자 가족이 왕래하다가 위치가 발각된 사례도 꽤 많다. 수십 억대의 고급 안가가 아니고서야 사실상 보안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B 전 지검장은 “미국은 주민번호 변경, 성형수술, 해외도피자금 제공 등 피해자 보호를 위한 다양한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우리도 2009년 이 시스템을 들여오려다 국회에서 막혔는데 좁은 땅덩어리에서 피해자 보호를 제대로 하려면 적어도 주민번호 변경과 성형수술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
‘대통령 안가’ 한때 12채나 ‘국정원 안가’ L 호텔 구설
안전가옥은 그동안 주로 고위급 인사들이 기거하는 ‘은밀한’ 가옥의 이미지로 세간에 알려져 왔다. 안가가 고급스런 이미지로 인식된 결정적인 계기는 2010년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사망 직전까지 머물었던 시가 30억 상당의 고급 안가가 언론에 공개되면서부터다. 대지면적 353.4㎡, 연면적 278.94㎡의 이 고급 안가는 공시지가(2010년 10월 기준) 18억 2422만 원으로, 약 30억 원을 웃도는 실거래가 알려지면서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안가’하면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대통령 안가다. 1979년 고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던 ‘궁정동’ 안가도 대표적인 고급 안전가옥 중 하나다. 궁정동에만 6채의 안가가 있었는데 외면은 단층 한옥이었지만 내부는 고급 레드카펫이 깔린 특급호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밖에도 삼청동, 한남동, 청운동 등에 대통령 안가 12채가 분산돼 있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사라지고 삼청동 안가만이 홀로 남았다.
대통령 안가보다는 한 급 아래지만 한때 국정원 침입사건으로 화제가 됐던 ‘호텔 안가’도 눈여겨볼 만한 고급안가 중 하나다. 국정원 전용 안가로 알려져 유명세를 탄 L 호텔이 대표적인 케이스. L 호텔은 2011년 3월 인도네시아 특사단이 방한했을 때 ‘신종’ 고급 안가로 유명세를 탔다. 당시 국정원 직원 3명이 특사단이 머물던 L 호텔 디럭스룸에 침입하다 발각되자 이를 두고 일각에선 “국정원이 L 호텔에 ‘안가’ 형태의 상시 사무실을 열어두고 해외정보를 수집하려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해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