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최명재 회장과 롯데호텔, 양쪽의 주장이 ‘일치’하는 부분만 추려보면 당시 사고의 시작은 이렇다. ‘2000년 7월19일 최 회장이 부인과 함께 제주도 롯데호텔에 투숙했다. 문을 연 지 넉 달밖에 되지 않은 이 호텔에 최 회장은 네 번이나 다녀갔을 정도로 단골 고객이었다. 묵은 지 사흘째 되던 날인 7월22일 오후 4시20분쯤. 최 회장은 평소대로 호텔 지하 사우나를 찾았다. 샤워를 마친 뒤 온탕에 입수하는 순간 최 회장은 ‘으악’하는 비명소리를 질렀다. 탕 안에는 60℃가 훨씬 넘는 뜨거운 물이 계속해서 채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장 원인은 냉온 자동조절 밸브의 이상.
최 회장은 곧바로 인근 서귀포의료원 응급실로 옮겨진 뒤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한강성심병원에 입원했다.…’하지만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두고 양측의 주장은 첨예하게 엇갈린다. 바로 밸브 고장에 대한 ‘경고 조치’. 박재홍 롯데호텔 홍보팀장은 “온탕 주변에 의자, 쓰레기통, 마대걸레 등을 걸쳐놨다. 작업자가 고장을 수리하던 중이어서 이를 못본 것은 일정부분 본인의 부주의”라고 말했다.
▲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의 95년 모습. | ||
다만 “미리 물의 온도를 재고 들어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목욕 습관”이라는 호텔측의 주장에 대해서는 “탕 온도를 재지 않고 ‘풍덩’ 들어가는 것이 최 회장의 목욕 습관”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쨌거나 병원에 옮겨진 최 회장은 꼬박 넉 달 동안 전신에 붕대를 감고 침대 신세를 졌다. 병원 진단서에 따르면 최 회장의 상처는 신체의 85%가 뜨거운 물에 데인 2~3도의 ‘전신 열탕 화상’. ‘목숨이 위태로운 정도이며 2~3주 뒤가 고비’라는 것이 당시 진료 의사의 소견이었다.
이 시기를 지켜본 최 회장의 부인 정금화씨는 “매일매일 해가 뜨는 것이 두려웠던 때”라고 기억하고 있다. 정씨는 “고열과 오한이 온몸을 번갈아 오갔으며 음식은커녕 주사로 연명하고 신경계통의 이상으로 20~30분마다 한 번씩 대겮捻? 치워야 했다”고 말했다. 극도의 공포심으로 몰핀 주사까지 맞아야 했던 최 회장은 담당의사들에게 “당신은 악마다”라고까지 소리치기도 했다. 최 회장은 이후로도 둔부의 피부이식 수술을 위해 한 차례 더 입원을 했다. 하지만 그는 특유의 정신력으로 화상을 극복해냈다. 간병인이 ‘인간 승리’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올해 3월, 최 회장의 상태를 진단한 김석원 원주기독병원 성형의는 “현재 새 살이 돋고 있는 상태여서 더 이상의 이식 수술이 필요 없을 정도다. 고령에 비해 ‘소름이 끼칠 정도’의 빠른 회복”이라 했다. 하지만 그는 “정상적인 생활을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 회장이 그나마의 기적적인 회복을 보이고 있는 동안 롯데호텔과 파스퇴르의 관계는 점점 곪아가고 있었다.
먼저 최 회장의 가족들이 반발하고 있는 것은 병원에 문병을 온 호텔 관계자들의 언행. 간병인들이 법원에 진술한 당시의 상황은 이렇다. 호텔 관계자들은 병원에 찾아와 위독한 병상의 최 회장에게 ‘얼굴이 좋아 보이십니다’ ‘얼른 나으셔서 제주도로 놀러오십시오. 골프장에 모시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회장님, 탕 주변에 바가지를 엎어두었는데 왜 들어가셨습니까’라는 말을 해 가족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는 것.
또 이런 경우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사회적 지명도’를 배려한 롯데호텔측의 조치는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대목이 최 회장측이 손해배상 소송까지 제기하고 나서게 된 배경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 염상훈 그린화재보험 기업보험부 대리는 “보험 혜택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이 원칙”이라며 “하지만 최 회장의 신분을 고려해 특실 사용에 따른 금전적 손실을 회사가 감수했다”고 말했다. 보험회사는 지금까지 7천여만원의 치료비를 지급했다.
롯데호텔측은 2년 전 사고가 손해배상 소송으로 인해 언론에 다시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듯한 모습이다. 제주 롯데호텔측은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며 전화 통화를 꺼렸으며 서울 본점에서도 “호텔측에서는 사과를 포함해서 (보상을) 할 만큼 했고 이제 우리 손을 떠나 보험회사와의 정산 문제가 남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호텔 관계자에 따르면 입원 초기 호텔 담당과장을 병원에 상주케 해 최 회장을 돕게 했다고 한다. 총지배인과 담당팀장 등이 모두 18차례나 병문안을 다녀갔다는 것.
반면 최 회장은 호텔 ‘책임자’들의 정중한 사과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간병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최 회장은 병문안을 온 호텔 직원들에게 ‘자네들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괜히 고생하지 말게나’라며 오히려 안심시키는 말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은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기 한 달 전인 지난 2월, 롯데호텔 장성원 사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최 회장은 이 편지에서 “생명을 건진 것은 고마운 일이나 이제 나는 평생 남의 도움 없이는 생활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라며 “그런데도 사전에 경고조치를 했다며 사실을 왜곡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최 회장의 편지를 소송 전초전으로 해석했던 것일까. 그러나 곧바로 우체국 내용증명으로 날아온 롯데호텔 장 사장의 세 장짜리 답변서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