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일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이 김근태 우리당 원내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가운데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와 박상천 민주당 대표의 굳은 표정이 눈에 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열린우리당(우리당) 출범으로 지난 노태우 정권 초기보다도 심한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됐지만 현재 정국의 방향을 노무현 대통령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태우 정권 초기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노태우 정권이 중간평가를 무산시켰던 것과 달리 노 대통령은 재신임 선언을 통해 오히려 그 입지를 강화시켜 나가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최근 야당 간의 ‘역학’ 관계 역시 원로 정치인들에겐 격세지감마저 느끼게 할 정도로 달라졌다. 당초 소수 여당인 우리당과 청와대가 거대 야 3당에 의해 포위 당해 사면초가에 빠질 것으로 예상됐던 것이 사실. 하지만 정치자금 문제 등 뜻밖의 변수로 인해 여권을 상대하는 야당 간의 이해관계가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그간 노 대통령의 측근 비리 문제와 재신임 발언 등에 대해 ‘한목소리’로 비난 여론을 주도했다. 하지만 재신임 국민투표 논란과 대선자금 특검법 처리 문제 등에 대해선 서로 엇갈린 목소리를 내거나 상대당을 비방해 ‘태생적 이질감’을 드러냈다. 이라크 추가 파병안에 대해선 정신적 여당을 자처하는 우리당 내부에서도 대통령 뜻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렇듯 정당·정파 간 이해에 따라 ‘공조 파트너’와 ‘주적’이 수시로 변하는 현재의 상황을 두고 정가 일각에선 ‘스와핑 정국’이란 말까지 나돌고 있다. 지난 2일 노 대통령이 정치자금 전면공개를 주장하고 나섬에 따라 다시 급박하게 요동치고 있는 정치권.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안개정국에서 각 정파는 과연 누구와 손을 맞잡고 또 어떤 상대를 향해 총구를 겨눌 생각을 품고 있을까.
수세에 몰린 원내 제1당 한나라당은 전체 ‘화력’을 청와대에 집중시킨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다. 국회 내에서 빚어지는 민주당이나 우리당과의 논쟁에는 힘을 아끼고 대신 노 대통령에게만 포화를 퍼부어 정국을 ‘노무현 대 한나라당’ ‘노무현 대 최병렬’ 구도로 가져간다는 것. 이는 최병렬 대표의 당내 위상은 물론 대외적 입지까지 높이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노 대통령 재신임 발언 이후 최 대표에게서 원내 제1당 대표로서의 여유를 찾아보기 힘들었다”며 “노 대통령이 재신임 발언을 한 직후 당사 기자실로 곧장 달려와 노 대통령을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너무 성급했다. 그 정도는 대변인에게 맡기고 대표는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의 다른 의원도 “재신임 정국 이후 노 대통령에게 끌려가며 조바심을 드러냈다. 그렇게 카리스마가 떨어진다는 점에서 이회창 전 총재와 곧잘 비교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신적 여당을 자처하는 우리당이 제3당에 불과해 정치적 고립이 가능한 노 대통령의 입지를 ‘최 대표가 너무 나선 탓’에 올려준 셈이란 지적이다.
이러한 ‘자성’은 지난 2일 노 대통령의 정치자금 전면 수사 제안에 대한 대응에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날 최 대표는 발언을 자제하고 이재오 신임 사무총장이 “대통령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며 노 대통령을 비난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종전 같으면 대표가 기자실로 득달같이 달려가 기자들 모아놓고 (노 대통령 발표에 대해) ‘뭐하는 짓인가’라는 식으로 흥분한 모습을 보였을 텐데…”라며 “이제야 다수당 대표 같은 모습을 보이려나 보다”라고 평했다.
최병렬 대표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앞으로 최 대표가 직접 나서지 않고 해당 분야에 능한 의원들이 중용돼 ‘대 노무현 공세’에 사안별로 투입될 것”이라며 “이번 건도 정치자금 문제라 사무총장인 이재오 의원이 맡아서 대응한 것”이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이 반대 의사를 표명한 특검제에 대해서도 한나라당은 ‘특검제 전담팀’을 따로 구성해 대응할 계획이다. 법조 출신 의원들로 팀을 구성해 직접 노 대통령과 맞각을 들이대게 만든다는 것. 그러나 대여 강경투쟁 일변도로 흐름이 바뀌면서 친 이회창 전 총재 인사들이나 서청원 전 대표의 주변에서 자칫 최 대표의 권위적인 당 운영을 비판하고 나설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우리당 인사들은 기본적으로 내년 총선 이후 한나라당과 양당 구도로 정국을 이끌어가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민주당과의 차별화를 통해 총선에서 적어도 원내 제2당 자리는 확보하겠다는 속내다. 큰 틀에서 보면 우리당의 ‘대야’ 대응도 이런 구도 아래서 이뤄지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당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대 한나라당 공세’를 맡아준다면 우리가 민주당과의 정책·이미지 대결에서 밀릴 까닭이 없다”고 밝혔다.
지난 2일 노 대통령 기자간담회를 두고 우리당 내에선 ‘당의 기대감에 대해 노 대통령이 어느 정도 부합해 준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날 노 대통령은 대선자금에 대한 검찰의 전면적 수사를 제안하면서 한나라당이 제출한 3개 특검법안에 대해서는 분명한 반대의사를 피력했다.
이에 대해 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대선자금 문제에 대해 저토록 당당할 수 있는 것은 한나라당보다 ‘한수 위’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대선자금에 대한 검찰의 전면적 수사를 통해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의 추가 혐의나 일부 우리당 인사들의 대선자금 관련 혐의가 포착되더라도 한나라당이 입을 타격에 비하면 우려할 수준이 아니라는 ‘확신’이 노 대통령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당의 한 의원은 “대선자금 정국을 노 대통령이 주도하는 한 민주당보단 우리당의 역할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며 내년 총선 결과가 ‘우리당-한나라당’ 양강 구도로 형성될 것이란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현재 민주당 탈당파와 시민단체 출신이 뒤섞여 있는 우리당의 임시지도체제 내부에서 조기 당권 경쟁이 벌어질 우려도 일각에서 제기되는 중이다.
한편 민주당은 우리당과의 경쟁에서 ‘밀리면 죽는다’는 위기의식으로 중무장한 상태다. 민주당 인사들이 ‘우리당’이란 당명 대신 ‘노무현 신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서도 날카로운 신경전을 엿볼 수 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 재신임 정국 이후 비공개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신당’이 호남권 등지에서 약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밝혀 당내 위기감을 대변해 주기도 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노무현 신당이 대통령을 앞세워 우리를 배제하고 한나라당과 2강 구도를 만들려 한다”며 “현재 민주당의 우선 공격 대상은 노무현 신당”이라고 지목했다. 한나라당까지 ‘맞상대’할 겨를이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민주당은 당장은 지난해 대선자금 규명에 주력한다는 입장이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이 탈당했고 당 사무총장이었던 이상수 의원이 우리당으로 옮겨간 만큼 대선자금 논란에서 민주당은 큰 부담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김경재 의원은 “대선자금에 관련된 중요한 문건이 더 있는 것으로 안다”며 포문을 열고 있고, 유종필 대변인 역시 “신당이 가져간 대선 당시 사용된 영수증을 공개하라”며 우리당을 압박하고 있다. 대선 당시 재정과 관련된 문건들에 대한 공개 요구를 통해 노 대통령과 우리당이 내건 도덕성에 흠집을 내겠다는 속내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밖으로는 신당을 공격하면서 안으로는 호남 정서를 하나로 다시 뭉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로 당의 ‘전략적 스탠스’를 설명했다. 우리당을 적절히 견제하면서 호남 정서를 잘 관리한다면 내년 총선에서 ‘한나라당-민주당’ 양강 체제를 만드는 데 큰 무리가 없다는 판단이다. 민주당 인사들이 지난 3일 노 대통령이 ‘김대중 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한 것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도 비슷한 맥락을 띠고 있다. 민주당을 버린 노 대통령이 민주당의 안방인 호남 정서를 파고드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적진’을 향해 이처럼 깃발을 높이 세운 민주당이지만 내부 결속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우선 조순형 의원에 대한 당 중진들의 중앙위의장 합의추대론과 추미애 의원 등의 경선 강행 의사가 부딪치는 중이다. 일단은 이달 28일로 예정된 전당대회를 잡음 없이 치러내야 우리당에 대한 효과적인 공세도 가능할 것이란 지적이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 선언 이후 정국 주도권을 쥐면서 민주당은 지원사격을 바라는 한나라당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고 있다. ‘신세’가 바뀐 민주당 또한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의 ‘도움’이 절실한 상태다. 하지만 민주당은 최근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특검제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찬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를 두고 때로 한나라당과 부분 공조를 하면서도 호남 정서를 의식해 일정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민주당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노 대통령의 정치자금 전면 수사 제안 이후 한나라당 홍사덕 총무는 책임총리제의 당위성을 적극 주장하고 나섰다. 책임총리제는 민주당이 주장해온 분권형 대통령제와 맥을 같이한다. 홍 총무의 주장이 한나라당 내 영남권 중진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양당이 다시금 같은 목소리를 낼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최병렬 대표가 “권력구조 개편 논의는 총선 후로 미루자”고 강하게 나서고 있어 민주당과의 정책공조가 성사될지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