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김씨는 홍업씨가 대기업 등으로부터 받은 각종 ‘비자금’을 돈세탁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또한 홍업씨 지시를 받고 그가 기업체 돈을 ‘수금’을 한 사실도 드러났다. 그는 ‘국정원 돈 5억원쯤’, ‘후광 돈 확인’ 등의 내용이 담긴 의혹투성이 메모를 남겨 정치권을 뒤집어 놓았지만 아직까지 메모의 ‘진실’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러한 각종 의혹을 받아온 김씨가 김홍업씨 첫 재판이 열릴 무렵이던 지난 8월 초 갑자기 미국으로 출국해버린 것이다. 본인은 ‘유학 간다’고 주위에 말했지만 그 배경을 둘러싸고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과연 김병호씨가 해외로 나간 까닭은 무엇일까.
김씨는 지난 8월 초 미국으로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8월2일 김홍업씨 첫 공판이 열린 지 며칠 뒤 김씨는 유학을 위해 미국에 간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출국 사실의 ‘보안’에 신경을 썼는지 한국 국적기가 아닌 다른 외국 항공사를 통해 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의 한 측근은 “이번 유학은 오래 전부터 계획됐던 것이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미국에 간 것으로 알고 있다. 장기코스로 갔기 때문에 미국 체류 기간도 길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가 현재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한 측근은 “LA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김씨는 지난 8~9월 뉴욕의 한국 식당이나 명품점에도 한번씩 모습을 드러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유학생’답지 않게 현지에서의 씀씀이가 꽤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씨의 유학에는 김홍업씨 변호인인 유제인 변호사도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유 변호사는 “김씨가 내게 찾아와 자신이 미국유학을 가는 데 보증을 서 달라고 부탁했다. 김씨는 지난 6월 말 검찰 조사를 받을 때만 해도 출국금지 상태였지만 조사가 끝나자 출국금지가 풀린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미국 비자도 보여주기에 확실한 줄 알고 보증을 서주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언제라도 검찰이 김씨를 소환하면 본인이 한국으로 들어온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한편 박만 대검 수사기획관은 김씨의 미국 출국 사실에 대해 “김씨가 유학간 사실은 전혀 몰랐다. 또한 유제인 변호사가 그의 출국에 대해 보증을 섰다는 것도 처음 듣는 소리다. 김병호씨는 피의자가 아니라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행방에 대해선 알 필요가 없다. 정식으로 고소가 들어오면 그를 수사할 수 있지만 현재로선 김씨 조사 계획이 없다. 또한 증인 신청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박 기획관은 “현재로선 김병호씨와 관련한 모든 수사가 종결된 상태”라고 밝혔다.
하지만 검찰이 김병호씨를 참고인으로만 간단하게 조사한 것 같지는 않다. 여권 인사 A씨는 김홍업씨 사건과 관련하여 검찰과 김씨의 ‘상호교감’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 김병호씨는 지난 5월 말부터 6월 말까지 검찰의 소환조사에 불응, 약 한 달 간 잠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검찰과 김씨는 여러 경로를 통해 ‘연락’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김씨는 잠적상태에서 검찰에 전화를 걸어 ‘검사님, 저 한번만 믿어주십시오. 모두 준비해서 들어가겠습니다’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씨는 검찰 수사에 상당히 협조적이었다”고 밝혔다.
▲ 동교동 아태재단 건물. | ||
김씨는 홍업씨가 지난 6월21일 검찰에 구속되고 며칠 뒤 검찰에 자진 출두했다. 이후 검찰의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실제로 홍업씨가 받은 돈의 액수는 구속 당시 22억8천만원이었지만 기소 단계에서는 25억원이 더 늘어났으며 죄목도 조세포탈 혐의가 추가됐다. 또한 구속 당시 드러나지 않은 ‘삼성 현대 22억원 수수 건’도 새롭게 밝혀져 홍업씨와 DJ정권의 도덕성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김병호씨는 김홍업씨 최측근으로서 홍업씨의 ‘은밀한’ 활동사항과 아태재단 살림과 운영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김홍업씨가 재단 부이사장을 맡고 있긴 했지만 ‘이름’뿐이었고 김씨가 재단 후원금과 행정을 맡아 처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태재단 한 관계자는 “재단은 학술기관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구원들이다. 재단 살림은 김 실장이 도맡아서 처리했다. 김홍업 부이사장은 주로 역삼동 개인사무실로 출근하면서 보고 받을 일이 있으면 김 실장을 불러 일을 지시했다. 대신 김 실장이 재단의 시시콜콜한 사항까지 모두 알아서 처리했다”고 밝혔다.
또한 김씨는 홍업씨의 비자금을 ‘수금’하러 다니는 일종의 ‘심부름꾼’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홍업씨가 삼성으로부터 수수한 5억원과 관련한 사례. 지난 8월2일 열린 김홍업씨 첫 공판에서 밝혀진 내용을 보면 홍업씨는 삼성으로부터 5억원을 수수할 때 김병호씨를 통해서 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홍업씨에게 삼성측 돈을 받아올 것을 지시받은 김씨는 측근 김아무개씨에게 연락해서 삼성 본관 지하주차장에서 현금 5억원을 받아왔다고 한다. 앞서의 A씨는 이에 대해 “오직 김병호씨만이 김홍업 부이사장 지시를 받아 돈 심부름을 하러 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 김씨가 이번에 밝혀진 현대 삼성으로부터 받은 돈 외에 다른 대기업에서도 돈을 ‘수금’하러 다녔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또한 김씨는 홍업씨 비자금 중 일부를 돈세탁해줄 정도로 홍업씨 ‘금고’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김씨는 홍업씨로부터 수표 등을 받으면 재단 직원들을 통해 현금으로 바꾼 뒤 이를 다시 수표로 바꾸는 수법으로 돈세탁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업씨는 지난 98년 현대로부터 받은 10억원을 자신의 베란다에 숨겨오다 김병호씨를 통해 16개의 차명계좌에 나눠 입금시킨 뒤 1백만원짜리 수표로 뽑아 쓰기도 했다. 이에 대해 홍업씨는 지난 8월2일의 첫 공판에서 “차명계좌를 통한 입출금은 통장을 관리한 김병호 전 아태재단 행정실장이 알아서 했지만 문제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이는 김씨가 홍업씨의 차명계좌를 관리했음을 확인해 주는 대목이다.
김병호씨는 ‘비밀’ 메모와 관련해서도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이 메모에서는 김홍업씨와 아태재단, 그리고 그 주변의 정체 모를 돈 흐름과 관련한 내용으로 검찰 조사까지 받았지만 무혐의 처리 받은 바 있다. 당시 메모내용은 ‘국정원 5억쯤? 1억짜리도’, ‘아직 나온 것 無(무)’, ‘청문회 방지’, ‘재단 성역?’ 등 해석에 따라 민감한 사안이 포함돼 있었다. 특히 ‘후광(김 대통령의 호) 돈 확인’ 대목에서는 이 의혹의 끝이 과연 어디인지 가늠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의혹투성이었다.
김씨는 ‘국정원 5억쯤’과 관련해서 “친구 부탁으로 국정원에 전산용지 납품관련 예산을 물어본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후광 돈 확인’에 대해선 “후광문학상 기금의 무리한 모금과정을 거론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거론된 당사자들은 이런 ‘변명’에 대해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반박했다. 김병호씨 메모와 관련해서는 아태재단과 국정원간의 비밀스런 돈 관계, 그리고 DJ의 비자금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의혹이 제기됐지만 검찰은 이에 대해 속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사건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