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만 보고 간다 한나라당의 특검법 도입 추진 에 자존심이 상한 검찰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사진은 송광수 검찰총장(왼쪽)과 안대희 중수부장. | ||
검찰이 마침내 ‘검은 돈’과 ‘정경유착’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불법 정치자금 전반에 대해 메스를 들이대고 나섰다.
‘SK 비자금 사건’을 수사중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부장 안대희 검사장)는 이번 주부터 SK 외에 삼성·LG·현대자동차·롯데 등 5대 재벌기업의 불법 대선자금 의혹에 대해서도 본격 수사에 들어갔다.
검찰은 일단 수사 범위를 ‘5대 그룹’으로 한정했으나, “추가로 다른 기업과 관련한 단서(+α)가 나오면 수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혀 향후 상황 변화에 따라 확대될 여지를 열어놨다.[관련기사 12.15면]
수사팀은 이를 위해 담당 검사를 6명에서 일단 8명으로 늘리고 곧 2명을 추가 투입할 계획을 세우는 등 ‘불법 정치자금과의 전면전’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검찰은 수사 확대를 결정한 배경에 대해 “SK 수사를 계기로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국민적 의혹이 커지고 있는 만큼, 차제에 전모를 파헤쳐 정치제도 개혁 등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런 대외적 명분 외에 정치자금 수사 확대로 검찰이 취할 ‘실리’도 당연히 염두에 뒀을 것으로 분석된다. 검찰이 기대하는 효과는 단기적으로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한 정치권의 특별검사제 도입 논의를 저지하는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하는 기틀을 확고히 다잡는 것이다.
이중 특검제 도입에 대한 검찰의 거부감은 SK 사건 수사 초기 한 검찰 간부가 “나중에 수사가 부실하거나 미흡하다는 이유로 특검이 도입된다면 사표를 던지겠다”고 주변에 밝힌 것으로 알려진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 때문에 검찰의 수사 확대 결정은 한나라당이 “우리 당의 ‘SK 돈 1백억원 수수’에만 수사가 집중되고 있는 것은 야당 탄압”이라며 특검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 검찰은 “법적 문제가 없다”는 이상수 의원(왼쪽) 조사 과정에서 삼성의 비자금을 포착했다. 오른쪽은 이재현 전 한나라당 재정국장. 임준선 기자 | ||
이와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일 기자 간담회를 통해 검찰의 공정하고 철저한 정치자금 수사에 원칙적 지지 입장을 밝혔으나, 수사 범위 등에 대해서는 검찰과 일정한 시각차를 나타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지난해 각 당이 사용한 대선자금의 구조적인 전모가 밝혀져야 한다”며 적어도 대선자금에 관한 한 ‘무제한 수사’를 주문했다.
그러나 검찰은 “무제한 수사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검찰 관계자는 “몇 개 기업을 추려서 수사하는 것도 계좌추적에만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판에 일정한 선을 긋지 않고 나오는 대로 하는 것은 수사 인력과 실무상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마니 풀리테’(Mani Pulite·깨끗한 손)식 부패척결 작업이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탈리아 검찰이 부정한 정·경유착을 뿌리뽑기 위해 1992년부터 3년간 벌였던 ‘마니 풀리테’식 사정 여파로 당시 이탈리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진 사실 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검찰 고위간부는 “검찰 수사 때문에 경제를 망쳤다는 소리가 나오면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말로 상당한 심적 부담을 느끼고 있음을 내비쳤다.
이 때문에 검찰의 수사 범위는 일단 5대 그룹들이 지난해 대선 당시 여·야 정치권에 제공한 정치자금 가운데 분식회계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조성했거나 영수증 처리를 하지 않은 ‘검은 돈’에 한정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특히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SK처럼 비자금의 전모를 규명한 뒤 그 용처를 따라가는 방식보다는 먼저 여·야 정당을 통해 이들 기업이 낸 정치자금을 파악한 뒤 이 돈의 불법성 여부를 가리는 방식의 수사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그럴 경우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는 올 연말까지 60일가량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라는 게 검찰 안팎의 전망이다.
수사 대상 기업의 경우, ‘5대 그룹’ 외에 지난 대선 때 민주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난 풍산, 두산 등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또 수사가 장기화할 경우 대외 신인도 등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속전속결’식 수사를 진행할 것이 확실시된다.
이에 따라 검찰은 이르면 이번 주말께부터 삼성 등 다른 4대 재벌기업의 자금담당 임직원들을 차례로 불러 대선 당시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제공한 정치자금 내역을 조사할 방침이다. 동시에 기업들의 모계좌 및 연결계좌에 대한 추적 등 자금출처와 조성경위에 대한 수사도 예상된다.
당장은 워낙 민감한 사안이어서 검찰 스스로도 주저하고 있지만, 여·야의 중앙당 및 후원회 계좌에 대한 자금추적이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이미 이들 대기업이 여·야에 제공한 자금 중 일부가 ‘문제 있는 돈’이라는 단서를 확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선 검찰은 지난 10월30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한 이재현 전 한나라당 재정국장(50)의 구속영장에서 “이 전 국장의 진술로 미루어 당시 한나라당 재정위원장실에는 SK의 불법 정치자금 이외에 다른 불법자금을 함께 관리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며 “다른 기업체로부터 추가로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의혹이 있어 이에 대한 수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한나라당의 추가 불법자금 수수 혐의가 포착됐음을 시사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함께 검찰은 지난 대선 당시 민주당 선대위 총무본부장이었던 열린우리당 이상수 의원 등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삼성그룹측이 노무현 후보 선거대책위 본부에 전달한 정치자금 10억원 중 3억원이 편법으로 제공된 흔적을 찾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측은 “전·현직 그룹 계열사 최고 경영자 3명이 개인 자격으로 각 1억원씩 후원금을 낸 것이며 입증할 자료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대희 중수부장은 “이 돈이 비자금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법인 기부한도를 초과해 불법적으로 제공한 정치자금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들 전직 2명, 현직 1명 등 ‘3인의 CEO’는 검찰의 수사 확대 이후 재벌기업 고위급 임원 중 첫 번째로 소환될 대상자로 거론된다.
수사 확대 이후 세간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재벌기업들의 불법 비자금 조성 내역과 각 정당으로 흘러들어간 정치자금 이외에 개별 정치인들의 ‘정치자금’ 수수 사례가 드러날 것인지 여부다.
노 대통령이 “수사를 비자금 전반으로 확대하지 않고 정치자금에 한해 수사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힌 데다 수사팀도 ‘경제를 생각하는 수사’를 강조하고 있어, 검찰의 칼날이 ‘그룹 비자금’ 자체를 정조준하는 상황은 오지 않을 것으로 일단 전망된다.
그러나 수사팀이 관련 계좌추적 과정에서 분식회계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조성된 돈의 꼬리가 잡힐 경우 이를 마냥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또 검찰 주변에서는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이 SK 수사의 ‘유탄’을 맞은 것처럼 여·야 정치인 중 일부가 다른 재벌기업체로부터 대가성 있는 자금을 받은 혐의가 불거질 개연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벌써부터 “잠 못 이루는 국회의원들이 많다”는 얘기가 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진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