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방에 근무하고 있던 한 검사가 두 사건의 수사 기록을 하나의 파일에 보관하고 있었다. 당시 의정부지청에 근무하면서 사건을 눈여겨보고 있던 홍경령 검사가 그 주인공. 홍 검사는 2001년 7월 서울지검 강력부 발령을 받자마자 책상에서 파일을 꺼냈다.
그로부터 1년 3개월 뒤, 이 두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붙잡힌 조천훈씨(32)가 서울지검 특별조사실에서 숨졌다. 거꾸로 3년 동안 이 사건을 별러왔던 홍 검사는 피의자 신분으로 구치소에 수감되는 신세가 됐다. 죽음으로 항변한 조폭의 ‘무고’와 홍 검사의 ‘집념’ 사이에는 과연 어떤 진실이 숨어있을까. ‘살인 수사’로 번진 ‘살인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어느 검사의 추락 서울지검 피의자 사망사건 관 련, 구속영장이 청구된 홍경령 검사가 6일 오 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법으로 들 어가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당시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파주 ‘스포츠파’의 신강인씨(가명•당시 31)가 교도소 내에서 외부 조직원에게 전달한 밀지 한 장이 사건의 진원. 밀지의 내용은 ‘박광민(가명•당시 32)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신씨보다 한 살이 많은 박씨는 조직 내 서열로도 한 급 위였던 인물. 신씨는 말하자면 옥중 쿠데타를 꾸민 셈이다.
밀지를 받은 진성규씨(가명)는 동료 조천훈, 최동현씨(가명)에게 내용을 전하고 살인 모의에 들어갔다. 최씨는 조씨가 숨지기 하루 전, 검찰 조사를 받다 도주한 인물이다.
98년 6월25일 오후, 조씨와 최씨가 망을 보는 동안 진씨는 또 다른 일행과 함께 일산시 일산동의 박광민씨 집 벨을 눌렀다. 진씨는 인터폰을 든 박씨가 낌새를 채지 못하도록 ‘검찰 수사관’을 사칭했다. 진씨는 박씨가 문을 열자 박씨를 욕실로 끌고 들어갔다. 박씨가 반항하지 못하도록 무릎을 꿇린 진씨는 준비해 간 칼로 박씨의 왼쪽 팔목 동맥을 두 차례 그었다. 그리고는 동맥이 절단된 박씨의 팔목을 물에 담가 둔 채 현장을 떠났다. 사건 현장을 감식했던 경찰은 자살로 종결을 지었다. 당시 사건을 수사한 일산경찰서의 형사는 “박씨 몸에 다른 외상이 없고 사고 전날 형과의 전화 통화에서 ‘죽고 싶다’는 얘기를 한 점 등으로 미루어 자살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반면 홍경령 검사는 박씨의 사체에서 발견된 의문점 때문에 타살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홍 검사의 변호를 맡은 박재영 변호사는 “홍 검사는 박씨 손목에 ‘주저흔’이 없었다는 점 등을 토대로 타살 혐의를 두었다”고 말했다. 주저흔이란 자해를 할 때 당사자가 머뭇거린 흔적. 그러나 홍 검사가 이 같은 ‘교도소 살인 배후설’을 접한 것은 이듬해인 99년 2월 무렵이었다.
경찰이 자살로 종결을 짓고 수사 마무리를 하는 동안에 안양교도소에서는 또다른 밀지가 건네지고 있었다. 옥중 살인 교사에 성공한 신씨가 자신의 출옥을 앞두고 같은 감옥에 있는 ‘스포츠파’ 후배에게 보낸 밀지였다. 스포츠파를 수사한 적이 있는 마포경찰서의 한 형사는 밀지의 내용을 이렇게 밝혔다. ‘박광민은 내가 알아서 처치했다. 다른 걱정은 하지말고 잘 지내다 나와라.’
이 형사에 따르면 신씨가 자신의 범행 내용을 굳이 쪽지로 알린 이유는 이랬다. 쪽지를 받은 권상배씨(가명)는 신강인씨보다 죽은 박광민씨를 더 따랐던 후배. 말하자면 신씨는 옥중 쿠데타에 성공한 뒤 출소를 앞두고 자신의 조직 장악력을 옥중에 있는 후배에게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다.
신씨는 이 쪽지를 보낸 뒤 얼마 안 있어 안양교도소를 출감했다. 하지만 신씨가 남긴 이 짤막한 쪽지에는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살인의 불씨가 숨어있었다. 쪽지를 받은 권씨는 고민을 하던 끝에 같은 감방에 있는 이종철씨(가명•34)에게 쪽지 내용을 털어놓았다. 이씨는 감방 동료 권씨의 소개로 예전부터 신강인, 조천훈, 최동현씨 등과 인사를 나눈 사이.
이듬해 99년 8월 출소해 형 집에서 기숙하면서 ‘채권 해결사’ 노릇을 하며 지내던 이씨는 보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린다. 감옥에서 권씨에게 전해들은 ‘밀지’내용이 이씨의 ‘밑천’이었다. 이씨는 신강인씨는 물론 조천훈, 최동현씨 등을 찾아다니며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하며 3천만원을 요구했다. 그 사이 권상배씨는 출소를 했고 신씨는 자신의 부하들을 추슬러 조직을 거느리고 있던 상황. 이씨의 협박을 받던 신씨는 급기야 이씨마저 살해할 모의를 시작한다.
검찰 영장에 따르면 두 번째 살인 사건에 가담한 사람은 모두 7명. 신강인씨는 첫 번째 밀지 임무를 수행한 진성규씨에게 살인 명령을 내렸고 진씨는 다시 조천훈, 최동현씨 등과 일을 꾸몄다. 권상배씨 역시 ‘밀지 누설죄’로 가담 압력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99년 10월 의정부의 한 커피숍에서 장만섭(가명)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만난다. 장씨는 빚 때문에 이씨로부터 독촉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 장씨는 ‘이종철을 죽이려고 하는데 당신은 이종철을 유인해 달라. 그러면 5백만원을 사례비로 주겠다’는 진씨 일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명 ‘스포츠파’ 일당이 이렇게 치밀한 범행 모의를 한 데에는 이씨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9년 10월께 이들 일당은 서울 노원역 근처 술집에서 장만섭씨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종철은 보통 놈이 아니다. 우리 쪽에서 사람이 동원되지만 너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데리고 와라.”
장씨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씨로부터 빚 독촉을 받는 권아무개, ‘아내에게 추근거린다’는 이유로 이씨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정아무개씨 등을 이 일에 가담하게 했다. 권씨 일행은 이씨를 불러내는 역할을, 진씨 일행은 살해 역할을 맡기로 분담한 것.
이렇게 모인 7명은 99년 10월16일 신촌의 한 술집으로 이씨를 불러 낸 뒤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유인해 준비해 간 흉기로 이씨의 전신을 찔렀다. 인근 병원으로 옮겨진 이씨는 다음 날 새벽 5시40분경 흉복부 자창(刺創)으로 숨졌다.
그리고 ‘밀지 두 장’에서 시작된 두 건의 ‘살인 사건’은 3년 뒤, ‘살인 수사’라는 역(逆)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구속영장을 토대로 보면 두 사건은 조폭에 의해 저질러진 치밀한 살인극이다. 하지만 숨진 조씨와 그와 함께 조사를 받은 ‘공범’들은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들의 말이 진실일까. 아니면 ‘살인수사’가 진상을 가리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