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안대희 부장,송광수 총장. | ||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는 얼핏 보기에 늦가을의 여느 건물들처럼 을씨년스럽기는 매한가지이나, 그 속에서는 불법 대선자금 수사에 대한 의욕과 긴장감이 빚어낸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더욱이 최근 정치권의 잇단 ‘딴지 걸기’로 검찰 수사가 난항을 겪고 있는 것과 관련해, 수사팀 주변에서는 뜨거운 수사 의지에 버금가는 ‘비장한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대검의 한 검사는 “나라를 위한 수사를 하다 보면 몇 사람이 희생될 수도 있으며, 다들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내부 정서를 전달했다. 마치 젊은 혁명가들이 ‘거사’를 앞두고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의 각오를 다지는 상황과 유사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것이다.
사실 검찰 수사팀은 당대 최고의 정치권력과 재벌기업을 건드릴 수밖에 없는 정치자금 수사의 어려움과 위험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진작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수사 사령탑인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이 수사 초기 일부 측근들에게 “여차하면 변호사 개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다”면서 비장한 각오로 ‘출사표’를 던졌다는 얘기도 있다.
물론 검찰이 정치권의 비난이나 탄압 자체를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수사팀 관계자는 “가장 두려운 것은 국민의 평가”라고 말했다. 정치권의 외압이나 방해로 수사가 굴절되거나 부실하게 되고, 이로 인해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다시 한번 떨어지는 것을 무엇보다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검찰은 벌써 다양한 형태의 압력과 방해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집권당이라고 할 수 있는 열린우리당의 경우, 겉으로는 검찰의 불법 정치자금 수사를 적극 지지한다고 밝히면서도 실제로는 자료 제출을 미루는 방법 등으로 수사팀의 발목을 잡고 있다.
특히 우리당은 수사팀이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을 지낸 정대철 열린우리당 상임고문을 소환조사하기로 하자 공개적으로 ‘검찰 때리기’에 나섰다.
김원기 창당준비위원장은 지난 7일 의원총회에서 “수사에 협조하는 우리당과 수사 자체를 거부하는 한나라당에 대한 검찰의 수사 태도가 공평하지 못하다”고 포문을 열었다. 당사자인 정대철 상임고문도 “특검을 하자는 야당 주장에 난감해진 검찰이 ‘억지춘향’식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무현 캠프에 대해서도 뭔가 하는 척하려는 느낌이 든다”고 검찰에 화살을 날렸다.
한나라당이 검찰을 압박하는 강도는 훨씬 세다. 지난해 대선 당시 SK그룹으로부터 1백억원을 제공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최돈웅 의원과 당 재정국 실무자들은 수 차례의 검찰 소환 통보를 묵살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한나라당 수뇌부는 청와대와 검찰의 ‘대선자금 기획수사설’을 제기하는 등 공세의 고삐를 죄고 있다.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검찰은 권력의 시녀’라는 표현도 다시 등장했다.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2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대선자금 전면 수사’를 독려한 다음날 검찰이 ‘5대 그룹+α’로 수사를 확대하겠다고 발표한 것을 문제 삼아 “청와대와 검찰이 신당 띄우기용 기획수사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대검 중수부의 정아무개 검사가 지난 6일 한나라당 후원회 박중식 부장을 소환조사하는 과정에서 “한나라당에 충성 말고 새로운 물결에 동참하라”고 말했다고 주장하는 등 검찰 비판 수위를 계속 높여가는 추세다.
이에 대해 송광수 검찰총장은 7일 “전쟁은 전체를 봐야 하는데 전투 장면 하나하나 보고 그때그때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라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다른 무엇보다 최근 가장 검찰을 자극한 사건은 한나라당의 특검제 도입 강행이다. 한나라당이 애초 대검 중수부가 수사중인 대선자금 의혹을 포함한 세 가지 분야의 특검법안을 상정하자 송광수 검찰총장이 공식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히고 거취를 표명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특검법안들이 원안 그대로 통과되면 중수부 수사팀이 이에 항의해 일괄 사표를 제출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막판에 노 대통령 측근인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 이광재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양길승 전 청와대 부속실장 등의 비리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특검법안만 상정함에 따라 일촉즉발의 위기는 별 탈 없이 지나갔다.
앞으로 남은 변수는 정치권의 지속적인 ‘검찰 때리기’ 및 비협조 외에 경제 문제를 앞세운 재계와 정치권의 검찰 협공 등이 거론되고 있다.
재벌기업 수사 확대와 관련한 수사팀의 기본 구상은 “SK그룹식의 전면 수사 대신 각 기업의 자발적인 협조를 얻어 일정 규모 이상의 불법 대선자금에 국한해 수사하고, 이를 연말까지 매듭짓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검찰의 이런 기대는 초장부터 어긋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최근 전경련 등을 통해 수사 대상 기업들에 자발적인 정치자금 제공 내역 제출 등 협조를 구했으나, 거의 예외 없이 난색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급기야 안대희 중수부장은 지난 7일 “기업들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이미 확보된 불법 정치자금 관련 단서를 토대로 정공법식 수사를 할 수밖에 없다”고 공개 경고를 하고 나섰다.
검찰의 이 같은 으름장을 뒤집어보면, 그만큼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수사팀이 정한 ‘대선자금 수사 로드맵’의 시한은 올 12월 말까지인데, 지금 수사 속도로는 목표 달성이 어렵다는 판단 때문.
안대희 검사장도 “여야 정당에 대한 수사와 대통령 측근에 대한 수사량이 방대하고, 또 일부 수사 관계자들의 비협조로 수사가 늦어져 장기화가 우려된다”고 털어놨다.
검찰이 예상하는 최악의 시나리오 중 하나는 재벌기업의 비협조 등으로 수사가 내년 이후로 장기화하고, 가뜩이나 침체된 경제사정이 더욱 악화돼 국민들로부터 “검찰 수사가 경제를 망쳤다”는 질책을 받는 것이다. 더욱이 이런 정황을 잘 아는 재계가 정치권의 입을 빌려 국민들의 경제불안 심리를 부채질하는 상황을 수사팀은 염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