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일가가 ‘절대 불가’ 입장을 꺾고 추징금을 자진납부하겠다고 나선 배경에 대해 궁금증이 더해지고 있다. 왼쪽부터 전두환 씨, 장남 전재국 씨, 차남 전재용 씨.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대국민 사과문을 읽는 전두환 씨의 장남 재국 씨의 표정은 침울했지만 당황스러워하는 빛은 없었다. 뒤이어 재국 씨는 검찰에 압류된 부동산, 연희동 자택, 경남 합천에 자리한 선산 등 총 1703억 원 상당의 재산을 내놓겠다는 자진납부 계획을 발표했다.
일단 지금까지 드러난 성적표만 보면 검찰의 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꼿꼿했던 전 씨 일가의 허리를 숙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수차례 정권이 바뀌어도 해결하지 못했던 추징금 환수 문제를 단숨에 해결했으니 검찰에서도 목에 힘이 들어갈 만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검찰과 전 씨 일가 누구에게도 고운 눈길을 보내지 않고 있다. 수사 종료를 앞두고 급박하게 진행된 일련의 과정에서 양측 간에 ‘뭔가’가 있었을 것이란 의구심 때문이다.
우선 전 씨 일가의 자진납부는 절대 ‘자진’이 아니라는 지적이 있다. 불리하게 흘러가는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일단 최악의 결과는 막고자 하는 데 뜻을 모은 것뿐이라는 얘기다. 당초 장남 재국 씨와 부인 이순자 씨는 자진납부에 ‘절대 불가’ 방침을 세웠지만 몇 가지 변수가 생기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순자 씨의 경우 전 씨 일가의 비자금 관리인 역할을 했던 동생 이창석 씨가 검찰에 소환되고 속전속결로 구속되는 지경에 이르자 마음이 흔들린 것으로 전해진다. 재국 씨 역시 더 버티다간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많다는 계산이 나온 듯하다. 본래 재국 씨는 전 씨의 4남매 가운데 가장 활발히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출판사인 시공사를 운영하는 등 사업에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상당한 재산을 축적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면서 가장 타격을 입은 쪽은 재국 씨였다. 정상적으로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난 7월 시공사 및 계열사가 압수수색 당하면서 사업에도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불매운동이 시작되는가 하면 자금줄까지 막혀 지인들에게 어려움을 토로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지난 7월 검찰이 장남 전재국 씨가 운영하는 시공사를 압수수색하는 모습.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또한 세금문제도 자진납부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부동산경매 전문 변호사는 “전 씨 일가가 내놓은 책임재산 대부분은 부동산이다. 이를 현금화화는 과정에서 세금이 발생하는데 강제몰수를 당했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전 씨 일가가 무조건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자진납부를 한 만큼 세금 부담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거액의 추징금을 부동산으로 내는 일은 전례가 없어 확신할 수 없으나 검찰이나 세무당국에서 어떤 합의가 있을 것이다. 검찰이 이 부분을 흘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이미 전 씨는 세금문제로 시달린 적이 있다. 지난 2003년 추징금을 내지 않았던 전 씨는 검찰로부터 연희동 자택에 붙은 경호동을 압류당했다. 이후 그 건물은 경매절차를 거쳤는데 그 과정에서 양도소득세 4600만여 원이 발생했다. 물론 전 씨는 돈이 없다며 이를 내지 않았고 지금까지 서울시 고액 지방세 체납자 명단에 올라 있다. 때문에 앞서의 변호사는 “이번엔 세금만도 수백억대에 이를 것이란 예상도 나오는 만큼 전 씨 일가로서는 추징금과 세금을 둘 다 내느니 (검찰과) 모종의 합의를 거친 뒤 자진압류를 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어쨌든 이번 자진납부로 전 씨 일가로서는 추징금에 대해서만큼은 모든 부담을 털어냈다. 앞으로 추징금 환수가 어떻게 이뤄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나 일단 전 씨 일가는 할 도리를 다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놓은 부동산이 수년간 팔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검찰에서 특별한 단서를 달아놓지 않는 이상 전 씨 일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으니 사실상 면죄부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전 씨 일가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다. 거액의 비자금을 바탕으로 지금껏 불법으로 재산을 증식한 부분에 대해 환수를 해야 하며, 체납한 추징금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이자를 받아내야 한다는 등의 부정적 국민 여론이 이번 전재국 성명의 저변에 깔려 있다. 검찰을 향해서도 “끝까지 파내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질타가 쏟아지고 있다. 16년 만에 추징금 환수 문제가 억지 춘향 식으로 해결은 됐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눈에는 ‘힘 있는 사람은 대충 봐 준다’는 찝찝함이 숨어 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