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친일파 김연수가 소유했던 경성방직 당시 모습.
부강한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생산력이 뒤지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으니 일본은 식민지에서의 공출과 군수물자 생산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나락 공출, 다음엔 사람 공출이었다. 한반도 전역에서 약 7000여 곳의 강제노역장이 운영됐고, 연인원 650만 명이 동원됐다. 약 20만 명의 남성들이 군인·군속으로 일본군에 끌려갔고, 100만 명이 광산, 조선소, 공장 등으로 강제징용됐다.
전쟁에는 여자와 어린이, 노인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는 8~16세 사이의 소녀들도 근로정신대, 할당 모집, 국민징용 등의 방식으로 끌고 갔다. 이들 중 절대 다수가 방적공장으로 징용됐다. 조선주둔군의 군복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현재까지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방적공장 피동원자는 285명이다. 피해자의 동원 당시 평균 연령은 12.17세로 소녀 노동의 대표적 사례다. 특히 10세 이하 아동이 무려 54명이나 된다. 당시 ‘국민징용령’에서 지정한 14세 이상이라는 법적 기준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그녀들의 70년 전 이야기
올해 83세의 장규순 할머니는 13세에 방직공장에 강제 징용돼 기계 속으로 손이 딸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장 할머니는 “밤새워 일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며 “존다고 많이 때렸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배고파서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훔쳐 먹다가 들킨 소녀들이 매를 맞고 멍든 얼굴로 벌을 서기도 했다”며 “또 맞을까봐 솜 속에 들어가 숨어 있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6·25 전쟁 후에 만나 결혼한 할머니의 남편도 징용 피해자다. 일본의 한 조선소에서 5년간이나 일했지만 임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조선소에서 왼손 중지·약지·소지를 모두 잃기까지 했다. 그 손으로도 솜씨 좋게 목수 일을 했고, 아내와 자녀들을 아끼는 가정적인 남편이었다.
위원회 조사2과장 정혜경 박사에 의하면 소녀들이 징용된 방적공장의 노동환경은 몹시 열악했다. 여러 대의 커다란 기계를 아이의 작은 손으로 동시에 조작했으며, 12시간씩 2교대로 근무했다. 아직 성장기에 있는 어린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가혹한 노동조건이었다. 작업장이 건조하면 실이 끊어진다는 이유로 연중 내내 30도 이상의 고온과 높은 습도를 유지했다. 밀봉된 창문으론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낮밤을 구분할 수 없었고, 솜에서 나는 먼지로 인해 면폐증 등의 직업병에 걸린 노동자도 많았다.
경북 예천 출신의 김분심 할머니(82)는 작업중 졸았다는 이유로 일본인 작업반장이 얼굴을 발로 차서 왼쪽 눈을 실명했다. 김 할머니는 쌀 공출량을 다 채우지 못했다 하여 2월의 어느 날 밤 끌려갔다. 당시 나이는 11세. 28개월간 인천의 방적공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할머니는 “고생은 말로 다 못 한다. 신발도 안 줘서 맨발로 다녔다”며 “안 죽고 산 게 다행”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특히 “실내가 정말 더웠다. 그래서인지 몸이 다 헐고 피부병을 앓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전남 나주 출신 최휴임 할머니(83)는 적극적으로 탈출을 시도해 성공한 경우다. 면직원이었던 작은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며 당시 13세였던 최 할머니를 광주 소재 방적공장으로 보냈다. 할머니는 면회 온 아버지를 따라 공장 담을 넘어 탈출했다. 일단 공장 담을 넘고 나니 공장직원들이 더 따라오지 않았다고 한다. 차를 타기가 두려워 광주에서 고향까지 걸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할머니는 작업반장의 폭행으로 오른쪽 눈을 실명한 뒤였다.
할머니는 도망가다 붙잡혀 온 소녀들에게 행해진 가혹행위도 들려줬다. 할머니는 “큰 광장이나 복도에 내놓고 때리더라”며 “머리를 깎고 옷도 벗겨서 방마다 데리고 다니며 망신을 줬다”며 몸서리쳤다. 이어 “그 다음엔 어떻게 됐는지도 몰라. 일하다 코를 다친 아이가 있었는데 어디로 보냈는지 다시는 못 봤다”며 “집에서 면회 오면 다들 많이 울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위원회 피해 접수에 따른 연구 결과에 의하면, 1940년 3월 8세에 동원돼 1945년 9월, 6년 만에 귀향한 소녀도 있었다. 동원된 지 불과 9개월 만에 부산의 조선방직 기숙사에서 사망한 10세 소녀도 있다. 동원된 지 1년 만에 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 왔으나 성폭력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례도 있다. 기계에 손이 딸려 들어가 손목 및 손가락이 절단된 사고를 입은 피해자들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의 고통을 잊지 못한다.
“일하다 죽느니 도망가다 죽겠다”며 탈출을 시도한 피해자들의 증언도 있다. 285명 가운데 13명이 탈출에 성공했거나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했다. 탈출이 실패해 다시 붙잡혀 오면 보복으로 구타가 행해졌다. 심지어 성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피해 보상 안돼 2중의 피해
이어 그는 “시청에 위로금을 받으러 갔더니, 외국으로 징용된 게 아니라서 해당 안 된다고 하더라”며 “국회·청와대·도지사에게 열 통이 넘는 진정서를 썼다. 국내나 국외나 다녀왔으면 다 줘야 하지 않냐”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이 씨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피해자들은 당시 임금은 물론, 법적으로 보장된 보험 및 원호제도에서 배제됐고, 현재엔 국외동원에 한해 위로금을 지급한다는 조항에 가로막혀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피해자 및 유족을 상대로 한 각종 사기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공장으로 끌려갔던 10대 소녀들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 “무사히 돌아오고 나니, 일본인들이 전쟁하는데 필요해서 끌려갔었던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정 박사는 “소녀 징용은 당시의 공장법상으로도 미성년자 약취 및 아동 학대에 해당한다”며 “징용이라고 하면 남자만 떠올리는데, 어린아이나 여성도 이 범주에 해당된다. 전쟁에 휘말린 여성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봐야 한다.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그들의 억울한 희생을 달래는 길”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신상미 기자 sh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