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월3일 김대중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과 함께 개막식장으로 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10월 중순 이후 재신임-대선자금 카드를 던져 일거에 수세 국면을 반전시킨 노 대통령이 내년 총선을 겨냥해 세력기반 확충을 위한 다양한 전략·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 기조는 ▲호남권 등 전통적 지지기반의 복원 ▲확고한 정치개혁 이니셔티브의 장악 ▲언론 등 비판계층과의 관계 개선 ▲관료 중용 등 인재 운용 스타일의 변화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분석이다.
여권 핵심인사들은 이러한 기조 변화의 배경에 대해 “극단적 ‘여소야대’지형 아래서 9개월여 간 정권을 운영해 온 경험과 측근 비리, 대선자금 문제 등 현안 대처에 대한 노 대통령의 판단과 해법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노 대통령 ‘변신’의 목적이 정국 주도권 장악에 있음을 인정한 언급이라 하겠다. 실제 여야는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이 변하고 있다”는 데는 공감하고 있는 상황이다.
'코드’와 ‘정면돌파’를 선호하던 이전과 달리 ‘현실주의자 노무현’의 색채가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변화가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전통적 지지기반 복원, 특히 ‘호남민심 되돌리기’ 행보다. 민주당 분당 때만 해도 ‘분당=호남 분열=총선 참패’ 주장에 “신당 창당이 개혁 세력의 약화를 의미하지 않는다”며 반박했던 노 대통령이다. 그런 그가 한나라당-민주당 공조로 윤성식 감사원장 국회 임명동의안이 부결(9월26일)된 후 ‘호남 구애’로 읽힐 만한 조치를 연이어 내놓고 있다.
첫 수순은 김대중(DJ) 정권에서 요직을 지낸 호남 출신 인사들을 다시 중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 대통령은 10월10일 윤성식 고려대 교수에 이은 새 감사원장 후보에 DJ 정권에서 공정거래위원장-기획예산처 장관-청와대 비서실장-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등을 섭렵한 전윤철씨(전남 목포 출신)를 지명했다. 사흘 뒤(10월13일)엔 최낙정 전 장관의 전격 경질로 공석이 된 해양수산부 장관에 역시 DJ 정권 시절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낸 장승우씨(광주 출신)를 임명했다. 인사문제를 매개로 한 노 대통령의 ‘호남 껴안기’는 지난 7일 광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 지역 출신인 정찬용 청와대 인사보좌관을 ‘정권 실세’로 치켜세운 데서도 명확히 나타났다. 노 대통령은 “인사하는 사람이 실세다”란 말로 호남권의 ‘인사 소외감’을 달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호남 구애작전’의 핵은 뭐니뭐니해도 DJ와의 관계 개선에 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노 대통령은 11월3일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 개관식에 참석, DJ를 “세계적인 지도자”라 극찬했는가 하면 자신을 ‘DJ 햇볕정책’의 정통 계승자로 자처하기도 했다.
여권은 노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가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 아래 지금의 기조를 계속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특히 청와대는 최근 대선자금 문제와 관련해 자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호남권 조사대상의 60% 이상이 “민주당이 노 대통령을 겨냥해 대선자금 의혹을 집중 제기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응답한 데 크게 고무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큰 틀에서 DJ의 정책과 노선을 계승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며 “호남에 정치적으로 큰 빚을 지고 있고, 특히 국민통합을 상징으로 삼고 있는 노 대통령으로선 호남권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산술적인 정치적 이해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11월5일 청와대에서 신문사 편집국장단을 초청해 만찬 간담회에 가졌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여권 내에서는 이와 관련, 노 대통령이 지역구도 해소방안으로 자신이 제안한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정치권이 수용할 경우 내년 17대 총선 이후 분권형 대통령제 또는 책임총리제 실시 등 야당의 ‘권력분점’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점을 재천명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최근 열린우리당은 물론 민주당과 한나라당 내에서도 중대선거구제 도입 주장이 확산되고 있는 만큼 노 대통령이 선거구제-권력구조 개편 문제에서도 ‘선수’를 쳐 주도권을 쥐려 할 것이란 분석이다.
언론과의 관계개선 움직임도 관심을 모으는 대목. 그동안 이른바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 등 보수언론과 첨예한 갈등을 빚어온 노 대통령이 최근 ‘이해’ ‘협력’ 등의 긍정적인 레토릭을 자주 구사하고 있기 때문. 특히 이달 초부터는 신문 방송 등 주요 언론매체 편집국장들과의 소그룹 미팅을 갖는 등 언론과의 ‘거리 좁히기’에 적극 나섰다.
우리당 내 노 대통령의 한 핵심측근은 “재신임 국면 돌입 후 나와 김원기 창당주비위원장 등이 대통령께 수차례 ‘제발 총선 때까지라도 조·중·동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언행을 자제해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며 “언론과의 갈등이 ‘반노’(反盧) 계층 확대재생산의 주요 기제로 작용했던 만큼 노 대통령의 변신이 앞으로 비판계층의 포섭 내지 중립화에 적지 않은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명했다.
우리당 주변에선 지난 1일 노 대통령이 후원자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소유 시거너스CC(충북 충주 소재)에서 부부동반으로 골프를 친 것에 대해 조·중·동의 보도가 ‘이례적으로’ 사실 전달 수준에 머물렀던 것을 노 대통령 초청 편집국장 만찬(5일)이 발생시킨 ‘효력’ 때문으로 해석하는 분석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연말 청와대-내각 대개편에서 노 대통령이 ‘코드’를 중시해온 기존의 인력 운용 패턴을 획기적으로 바꿀 것이란 분석도 관심의 대상. 이광재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등 측근들이 ‘아마추어리즘’ 논란 등 야당과 보수세력의 집중공세 속에 특검의 대상으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을 감안해 2기 청와대-내각을 관료와 외부 전문가 중심으로 구성해 국정의 안정감을 높이려 할 것이란 시나리오다.
이와 관련, 최근 노 대통령이 후대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조선 초기 외척 등 측근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하며 왕조의 기틀을 닦은 태종에 비유한 점을 두고 “국정 일선에 포진한 측근들을 대거 정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5일 각계 원로 지식인과 오찬을 가진 자리에서 “…조선왕조에서 태종이 세종 치세의 기반을 닦았다. 구태와 잘못된 관행을 깨끗이 청산해 다음 후배들이 다시는 흙탕길을 걷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평소 청와대 쇄신론을 강력히 주장해온 우리당의 한 의원은 “386 등 측근들의 2선 후퇴는 재신임 정국 돌입 이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됐다”며 “문제는 개편의 폭인데 노 대통령이 시간이 지날수록 국정 운영의 경험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느낌을 갖게 해 전면개편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