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본무 LG회장 | ||
이 사건을 수사중인 대검 중수부(부장 안대희 검사장)는 지난 3일 대선자금 전면 수사확대 계획을 발표한 이후 구본무 LG그룹 회장 등 기업체 임직원 20여 명을 출국금지했다. 이와 함께 불법 비자금을 조성한 단서가 포착된 1~2개 재벌에 대해서는 계좌추적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의 출국금지 조치는 수사 대상자에 대해 혹시 소환조사가 필요할 경우에 대비해 관행적으로 취해두는 것이어서 ‘출국금지=형사처벌’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에 출국금지된 기업인들은 대부분 해당 기업과 재계에서 굵직한 위상을 지닌 인사들이어서 충격파가 만만치 않다. 또 이들의 면면을 보면 검찰 수사의 방향과 수위 등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당장 5대 그룹 중 유일하게 그룹 오너인 구 회장이 출국금지된 LG그룹 측은 비상이 걸렸다. 구 회장이 직접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구 회장은 그룹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의 장손자로 LG그룹의 3세 경영인에 해당한다. 1995년 아버지인 구자경 명예회장이 일선에서 퇴임한 뒤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현재 LG 등 4개 계열사에 걸쳐 시가 총액 2천억원대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삼성그룹에서는 이학수 삼성전자 사장 겸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 안복현 제일모직 사장, 소병해 전 삼성화재고문, 이대원 전 삼성중공업 상담역 등이 출국금지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본부장은 그룹 총수인 이건희 회장의 분신이나 다름 없는 존재로, 정치자금 조성 및 집행 등을 총괄하는 역할을 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 사장 등 전·현직 경영진 3명은 대선 당시 삼성이 민주당에 제공한 대선자금 10억원 중 3억원을 편법 회계처리하는 데 이름을 빌려준 혐의를 받고 있다.
현대차그룹과 롯데그룹에서는 각각 대선 때 현대차 총괄기획본부장(부사장)을 지낸 정순원 현대차 사장과 신동인 롯데호텔 사장 등이 출금 대상자로 올라 있다.
이들 5대 기업 이외 대기업 및 중소 기업체들의 고위 임원들도 민주당 또는 한나라당에 불법 대선자금을 제공한 단서가 포착돼 출국금지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수사 관계자는 “5대·10대 기업에 포함되지 않는, 이름 없는 기업도 정치권에 불법 대선자금을 건넨 혐의가 있어 출국금지시킨 경우가 있다”고 밝혔다.
일단 현재 시점에서 검찰 수사와 관련해 가장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 기업은 LG그룹이다. 그룹 오너가 출국금지된 데다 정치권에 제공한 대선자금 중 상당액이 불법으로 조성한 비자금에서 나온 돈이라는 의혹이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은 최근 LG화학과 LG전자의 회계감사를 맡고 있는 S회계법인에서 관련 자료를 제출받는 한편, 감사 담당자를 직접 소환해 분식회계와 비자금 조성 여부 등을 조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강 부회장도 이미 1~2차례 소환조사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LG에 대한 검찰의 수사 강도가 상대적으로 센 것으로 외부에 비쳐지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은 LG측이 검찰 수사에 비협조적인 자세를 보여 ‘본보기 수사’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검찰은 그동안 “과거의 잘못을 자백하는 등 수사에 적극 협조하면 선처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수차례 재계에 날려왔다. 그런데 한두 개 기업은 이에 화답해 그간의 정치자금 제공 내역을 수사팀에 자진해서 제출하는 등 ‘성의 표시’를 하고 있으나, 나머지 기업들은 여전히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며 사태를 관망중이고 그 중에 LG그룹도 끼여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크리스마스 전 수사 종결’을 목표로 하고 있어 갈 길이 바쁜 수사팀이 재계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에서 LG그룹을 본보기로 삼아 고강도 수사를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LG그룹에 대한 수사가 부각되고 있는 것은 삼성그룹의 치밀한 전략이 성공한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삼성그룹은 일찌감치 전·현직 CEO 3명의 개인 명의를 빌려 민주당에 불법 대선자금을 제공한 정황이 드러나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자 ‘공연히 버티다 집중포화를 맞는 일만은 피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검찰 수사에 협조하는 모양새를 보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주변에서는 지난 4일과 10일 송광수 검찰총장과 남기춘 대검 중수1과장을 잇따라 만나 대선자금 수사에 대한 재계의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진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이 삼성측 입장을 따로 검찰에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현 부회장은 익히 알려진 대로 전경련에 몸담기 전에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장, 삼성물산 회장 등을 역임한 ‘삼성맨’ 출신이다.
또 삼성측이 다양한 경로를 이용해 검찰에 “수사를 받을 때 받더라도 대외 신인도 등을 감안해 삼성이 앞장서 매 맞는 것으로 비쳐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상황이 이렇지만 LG측은 “법정한도 내에서 영수증을 받고 투명하게 제공한 정당후원금 외에는 어떠한 불법적인 비자금도 조성하거나 제공한 사실이 없다”며 당당히 수사에 임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지난해 대선 직전 민주당에 10억원, 한나라당에 3억원씩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난 현대자동차그룹 역시 대선자금 일부를 계열사 임원 개인 명의로 편법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검찰은 이들 재벌기업이 제공한 대선자금의 뿌리는 비자금이고, 이 비자금은 계열사 중 건설·금융기업체를 통해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건설회사는 공사비 부풀리기 등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이 용이하고, 금융회사는 현금 동원력이 풍부한 데다 자금세탁까지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검찰 고위관계자는 지난주 “일부 기업체에 대해서는 계좌추적을 하고 있다”고 밝혀, 재벌 비자금 수사를 본격화한 것이 아니냐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검찰은 대상 기업이 5대 재벌인지 여부를 확인해주지 않고 있으나, 만약 삼성 또는 LG 등 거대 재벌의 비자금을 추적하는 것이라면 그 파장은 간단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분식회계, 횡령, 뇌물 등 기업의 모든 치부를 담은 ‘판도라의 상자’나 마찬가지인 비자금에 한번 손을 댈 경우 적당히 덮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그룹 오너가 형사처벌을 당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그래서 전경련 등 재계는 최근 검찰 수뇌부에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전체 비자금으로 수사를 확대하지는 말아달라”고 간곡히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재계는 검찰에 “자백을 하고 싶어도 특정 정당에 잘못 찍혀 보복 사정을 당할까봐 하기 어렵다”며 고충을 토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검찰의 입장은 단호하다. 수사팀 핵심 관계자는 “기업체 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불법 대선자금에 한해 수사를 끝내기 위해서라도 기업체의 자발적인 협조가 필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검찰로서도 정면으로 수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검찰은 재벌기업 압박을 위해 이미 분식회계 등 회계 비리의 수사 단서를 확보하는 한편, 재벌의 ‘아킬레스 건’인 오너 일가의 개인 비리에 관한 다양한 첩보들까지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래저래 재벌기업들은 막다른 선택의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