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그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동안의 베일을 벗고 국민들에게 ‘초라한’ 모습을 드러냈다. 인터뷰는 지난해 11월께 태국의 한 도시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뒤인 12월 초 김 전 회장은 이탈리아 로마로 다시 돌아갔다. 여권 만기일을 불과 하루 앞두고 서둘러 그의 ‘본거지’인 유럽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김 전 회장은 지난 3년여 동안 수많은 나라를 떠돌아다닌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 2001년 3월 검찰의 체포영장이 내려진 뒤 4개월 동안에는 무려 13개국을 출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국제 수배자’인 김 전 회장의 ‘홍길동식’ 도피행각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지 적잖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 게다가 김 전 회장이 지난 87년 프랑스 국적까지 취득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그의 체포가 완전히 물 건너 간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경찰은 인터폴과의 공조를 통해 김 전 회장의 체포를 기대하고 있지만 회의적이다. 일부에서는 그가 제 발로 귀국하지 않는 이상 체포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 전 회장이 어떻게 국제 법망을 유유히 빠져나가며 도피를 할 수 있는지 그 까닭을 추적해본다.
▲ 지난 98년 11월 김 전 회장이 서울대병원에서 만 성뇌경막하혈종 제거수술을 받고 퇴원하는 모습. | ||
인터폴은 전 세계에서 현재 약 7천 명의 적색수배자를 추적하고 있다고 한다. 김우중 전 회장도 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하지만 화려한 장비와는 달리 인터폴 ‘수사’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먼저 인터폴은 강제수사권이나 체포권이 없다는 데 해외도피범 검거의 어려움이 있다.
이 조직은 말 그대로 국가간 경찰들의 ‘기구’일 뿐 국제조약으로 맺어진 수사협력체제가 아니다. 인터폴은 범죄정보를 교환하는 창구 역할을 하고 범죄정보를 분석해 각국 경찰에 제공함으로써 범죄인 검거를 ‘간접적’으로 돕고 있을 뿐이다. 제한된 범위이긴 하지만 인터폴은 국경 밖으로 도주한 범죄인을 잡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지만 강제규정은 아니다.
미국에서 공인탐정으로 활약하고 있는 브루스 강씨(45ㆍ본명 강효흔ㆍ‘대성그룹 50억원 대출사기 사건’을 해결해 최초의 한미간 범인 인도 전례를 남긴 탐정으로 해외도피 경제사범 검거 전문가로도 통한다)는 이에 대해 “인터폴이라고 하면 국제적인 경찰 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직접적으로 타국에 가서 범인을 검거하는 등의 수사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정보를 교환하고 각국의 경찰 기관과의 협력 체제를 구축한 경찰 기구로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일종의 ‘행정기관’일 뿐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인터폴 회원국의 인력과 재정도 크게 모자라는 형편이다. 회원국에 국제수사를 담당하는 기관이 있지만 대부분 국가에서 해당인력이 크게 모자란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경찰청 외사3과의 인터폴 담당자는 약 12명 정도라고 한다. 전 세계 1백81개 회원국 수를 ‘커버’하기에는 역부족인 셈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경우 인터폴 담당자들이 너무 자주 바뀌어 업무 연속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전직 인터폴 관계자 A씨는 이에 대해 “담당자들이 업무에 익숙해지고 외국 관계자들과 친분을 쌓을 만하면 부서를 떠나게 된다. 경찰청에도 외국어에 능통하고 외국 수사기관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유능한 사람들이 많은데 인사이동이 잦아 그들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인터폴 회원국 간의 유기적인 협조체계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모두 자국의 사정이 우선이기 때문에 다른 회원국에서 협조를 요청하더라도 제 일처럼 도와주는 게 거의 불가능한 게 사실이다. 더구나 적은 인력으로 해외 도피범까지 쫓아다닐 정도의 여유가 있는 나라가 거의 없다고 한다.
앞서의 전직 인터폴 관계자 A씨는 “인터폴 회원국에 수사협조 공문 한 장 띄웠다고 해서 움직일 수사관들은 별로 없다. 누군지도 모르는 데다가 자신의 업무도 바쁘기 때문에 보낸 공문이 책상에서 잠자기 십상이다. 수사 협조 당사자국에 어느 정도 개인 친분이 있든가 전화 통화라도 수차례 하면서 적극성을 보여야 그나마 부탁한 사람의 ‘존재’를 알 정도다”며 협조수사의 어려움을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 2002년 2월 미국 FBI에 의해 체포된 ‘세풍’ 혐의자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의 경우만 보더라도 국제공조수사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한국의 법무부 장관이 지난 99년 11월 한국에서 열린 인터폴 총회에 참석한 미국 FBI 프리 국장을 직접 만나 그의 신병인도를 요청했다. 그러나 2년이 훨씬 지난 2002년 2월에서야 이 전 차장이 FBI에 의해 체포되었다. 법무부 장관이 직접 요청한 경우가 이 정도라면 공문 한 장으로 얼마나 많은 협조를 받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인터폴의 비효율적인 협조체계 탓도 있지만 김우중 전 회장이 세계를 ‘휘젓고’ 다닐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많은 지인들의 ‘도움’ 덕분이다. 실제로 김 전 회장은 ‘세계경영’을 하면서 관계를 맺은 세계 각국의 재계 인사 등으로부터 “돌봐줄 테니 오라”는 제의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럴 경우 ‘화려한 낭인 생활’ 운운할 국내 여론이 듣기 싫어 거절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 세계의 ‘대우가족’이 음과 양으로 힘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백기승 전 대우그룹 홍보이사는 이에 대해 “사실 김 전 회장이 국내에서만 소송을 당했지 외국 다른 기업에서는 한 건도 피소된 것이 없다. 김 전 회장과 절친한 전 세계의 기업가들이 그가 결백하다고 믿고 많이 도와주려 애쓴다”고 전했다.
김 전 회장이 해외 여러나라의 출입국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김 전 회장이 지난해 12월1일 부랴부랴 태국에서 유럽으로 돌아간 이유도 여권 만료가 불과 하루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유럽의 한 대사관 관계자는 “통상 유럽에서 여행을 하려면 여권만료기간이 6개월은 남아있어야 입국 때 비자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김 전 회장의 경우 여권만료가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도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출입국 사무소 지인의 도움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고 말했다.
사실 김우중 전 회장 정도의 ‘재력’과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세계의 많은 기업가들을 생각해 보면 그에게 ‘도피’의 꼬리표를 단다는 자체가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정작 김 전 회장의 축 처진 어깨를 더욱 짓누르는 것은 잠시 불편할 뿐인 도피의 괴로움이 아니라 평생 그를 따라다닐 ‘사기꾼 회장’의 낙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