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과 한 전 대표는 대선 후보-당 대표 시절 ‘불협화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서로 등을 진 채 ‘제 갈 길’을 재촉해 왔다는 게 일반적 평가. 새 정부 출범 직전인 2월23일 한 전 대표가 친노(親盧)그룹의 퇴진 요구에 밀려 대표직을 사퇴한 이후 신당 논란, 민주당 분당사태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 사이는 그야말로 ‘악화일로’였다. 특히 양측간 공방 와중에 ‘배신자’ ‘시정잡배’ 등의 극한용어까지 동원되면서 주변에서는 “둘간의 관계개선은 물 건너갔다”는 전망이 정설처럼 굳어지기도 했다.
▲ 지난 6일 청와대 조찬간 담회에서 악수하는 노무현 대통령과 한화갑 전 대표. 왼쪽은 대선 전 한 모임에서 만난 두사람. 청와대사진기자단 | ||
변화를 불러온 계기로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노 대통령과 호남권과의 관계개선으로, 이는 노 대통령의 적극적인 ‘호남민심 껴안기’에 영향받은 바 크다. 특히 연세대 ‘김대중(DJ) 도서관’ 개관식(11월3일) 참석을 전후해 노 대통령이 보여준 적극적인 DJ와의 관계개선 의지가 동교동계의 좌장인 한 전 대표측에 인상 깊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한 전 대표측은 당초 노 대통령의 변화를 “전술적 필요에 따른 계략” 정도로 평가절하하는 분위기였다. 분당사태 이후 갈수록 악화되는 호남권의 ‘반노’(反盧) 기류를 달래기 위한 ‘정치적 꼼수’ 정도로 본 것이다.
노 대통령이 한 전 대표의 절친한 친구인 전윤철 전 경제부총리를 새 감사원장에 지명하고, 역시 호남 출신으로 DJ 시절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낸 장승우씨를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했을 때만 해도 한 전 대표측에서는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구만”이라는 류의 냉소적인 반응이 주류였다.
▲ 지난 3일 'DJ도서간'개관식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식장에 들어서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비슷한 시기에 열린우리당측에서 DJ 장남인 김홍일 의원의 지역구(전남 목포)에 조직책 선정을 미루겠다고 밝힌 대목도 한 전 대표의 부담을 덜어줬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 부분. 특히 이 문제에 대해 우리당으로 간 몇 안되는 동교동계 출신인 박양수 사무처장이 ‘총대’를 멨다는 점이 관심을 모았다. “신경 쓸 때가 많은데 꼭 그런 곳까지 부닥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 박 처장의 ‘공식설명’이었지만 우리당 주변에서는 노 대통령-DJ 간 관계개선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는 의견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전 대표 계보로 불리는 민주당 의원들의 입에서 우리당과의 ‘공조’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도 대략 이 무렵부터다. 동교동계 의원 중 유일한 영남 출신인 설훈 의원은 “신당(우리당)과 민주당이 둘 다 살아남으려면 총선에서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선거 후에는 두 당이 자동적으로 합쳐질 것으로 본다”고 합당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설 의원의 뒤를 이어 동교동계의 ‘막내’격인 전갑길 의원도 우리당과의 ‘재통합’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고, 조성준 조한천 배기운 의원 등도 비슷한 취지의 얘기를 거론했으며, 정범구 의원은 민주당을 탈당한 후 “민주당과 우리당의 재통합을 위해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박상천 대표 등 현 지도부의 정국 운영에 대한 한 전 대표측의 불만도 노 대통령측과의 ‘거리’를 좁히는 계기가 됐다. 한 전 대표는 특히 대통령 측근 비리 특검법안을 놓고 당 지도부가 ‘찬성 당론’을 밀어붙여 내분을 야기한 데 대해 비판적이었고 본인을 비롯, 계보 의원들이 대부분 특검법안 표결에 기권 내지 불참했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한 전 대표는 “민주당은 노 대통령이 당을 떠났지만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당선시킨 자긍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성공한 대통령을 만들기 위한 애정을 버리지 않고 있다”며 “대통령 소속에 상관없이 우리 민주당의 본질은 수십 년간의 민주화 투쟁과 남북 화해협력 노선, 합리적 개혁의 본산으로서 수평적 정권교체와 정권재창출을 이룩한 국민의 여당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한 전 대표는 아울러 “야 3당 공조는 우리 스스로 민주당의 외연을 좁히는 것이 될 것”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한 전 대표를 바라보는 청와대의 시각도 변화가 뚜렷해졌다. 단순히 ‘호남민심 껴안기’의 일환이 아니라 전략적 차원에서 한 전 대표와의 제휴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얘기. 특히 ‘잠재적 우리편’이라고 생각했던 조순형 추미애 김경재 의원 등이 최근 보여준 일련의 행태에 실망하면서 상대적으로 한 전 대표와의 관계개선 필요성이 커졌다는 평가다.
실제 한때 한화갑 계보였던 문희상 비서실장과 유인태 정무수석 등 청와대 정무라인은 최근 한 전 대표와의 제휴를 전제로 내년 총선 이후 한 전 대표를 ‘중용’해 정국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총선 승리를 위해서는 범 개혁그룹 연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만큼 민주당 중도파에 영향력이 큰 한 전 대표와의 관계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 특히 한 전 대표가 민주당 분당 사태 이후 일련의 정국현안에 노 대통령의 뜻과 배치되지 않는 선택을 해 온 점과 DJ의 정책과 노선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현실적으로 호남 민심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인물이란 점을 연대론의 근거로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측은 특히 단기적으로 노 대통령이 측근 비리 특검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기로 마음을 굳힘에 따라 한 전 대표의 지원이 더욱 더 절실한 상황이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거부권 행사시 재적의원 3분의 2가 재의결에 찬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민주당, 특히 중도파들의 선택이 중요하다”며 “한 전 대표는 지난 특검 처리 표결 당시 반대 흐름을 이끈 분인 만큼 이번에도 그가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한 전 대표가 정국에 관한 명확한 입장을 갖춘 분이니 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란 기대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한 전 대표는 그러나 이 같은 기류를 노 대통령과의 화해나 우리당과의 재통합으로 바로 연결짓는 데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한 전 대표는 재통합 문제에 대해 “현재 양당의 기류나 감정상으로는 어렵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말로 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역사적인 소명이나 또는 그렇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경계가 필요하지만 아직은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해 상황변화에 따라 연대의 틀을 모색할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