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징용을 거부한 조선인들은 형무소에 수감돼 ‘형무소보국대’에 편입, 강제노역에 동원된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은 이들이 수감됐던 개성소년형무소 전경.
피해자들은 수감 후 사망하기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은 경우가 눈에 띄게 많았는데 그만큼 감옥의 환경이 가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직접적인 사인은 간수의 폭행, 재소자 간의 다툼, 전염병에 의한 병사 등으로 다양했다. 특히 10대 청소년도 다수 포함돼 있다. 이들은 소년형무소로 보내져 그곳에서 사망하거나 형무소보국대로 편입돼 강제노동 중 사망했다. 형무소 내에서 보국대로 편입되면, 도로 보수, 농경지 개간, 간척사업, 군수물자 생산, 비행장·방공호 건설, 비료공장 등에 투입돼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피해자 중 최연소자는 경북 칠곡 출신의 고 조봉발 씨로, 15세인 1944년 동원돼 같은 해 12월 개성소년형무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고인은 국내로 강제 동원됐다가 노역장에서 탈출해 집으로 돌아왔으나 체포되어 개성소년형무소에 끌려갔다.
조 씨의 조카 조성일 씨는 “부친이 살아계실 때 삼촌의 사연을 들었다”며 “삼촌이 나이에 비해 체격이 좋았다고 하더라. 어른처럼 보이니 끌고 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이어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노역하다가 얼마나 구타를 당했겠나. 정부에선 아무 대책도 없고, 연락도 없어서 화가 많이 난다”고 토로했다.
경기도 김포 출신의 유춘만 옹(86)도 18세 때인 1945년 1월, 징용에 끌려가다가 부산에서 탈출했다.
“처음에 갈 때는 일본의 조선소에 간다고 했었는데 부산에 가니, 인수인계 받으러 온 일본인이 탄광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다들 도망갔다. 아침에 여관에서 일어나 보니 다들 도망가고 한 사람도 없더라. 내가 가장 늦게 도망간 사람이다. 그렇게 돌아와 집에 있는데, 일본인 순사가 집까지 찾아왔다. 그길로 김포경찰서로 끌려갔다. 재판도 자기들끼리 해서 1년형 주고 나한테는 통보만 하더라. 그렇게 온 게 개성소년형무소다.”
유 옹은 징용을 거부한 것이 일본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해서 사상범으로 분류됐다. 독방에 갇혀 보리와 옥수수가 섞인 8등밥에 해초 무침을 먹었다. 8등밥은 어린아이 주먹처럼 양이 적었다. 영양실조에 위생 상태도 엉망이라 전 형무소 안에 장티푸스가 돌았다. 결국 유 옹도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는 “같은 병실에 있던 장티푸스 환자 17명 중 나 혼자만 살아남았다”며 “매일 1~2명씩 죽어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약도, 치료도 없고 격리 수용만 해놓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1942년 당시의 흥남비료공장. 함흥형무소에 수감됐던 피해자들은 이 곳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유 옹은 “8월의 어느 날, 조선인 간수가 와서 ‘조선이 해방되고 일인들은 모두 도망갔다’고 알려 줬다”며 “사상범을 가장 먼저 석방시켜줘서 16일에 나왔다. 바싹 마른 몸에 창백한 낯빛으로 화물열차를 타고 겨우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또렷이 기억했다.
유 옹에 의하면 개성소년형무소는 전체 수형자 700명의 대규모 형무소로소년형무소였으나 40대 수형자도 있었다고 한다. 형무소 내의 환경은 극히 불결해서 쥐가 들끓었고, 이로 인해 장티푸스도 퍼졌던 것으로 보인다. 공장 안엔 인쇄소가 있어서 수형자들은 그곳에서 노동을 했으며 수형자들을 동원해 일본인 형무소장의 집과 형무소 사이의 도로까지 닦았다고 한다.
한편 전체 87명의 피해자 중 41명이 함흥형무소 내 보국대 피해자로, 이들은 대부분 흥남질소비료공장으로 끌려가 살인적인 노동에 희생됐다. 흥남질소비료공장은 1927년 일본의 재벌 노구치가가 자본금 1000만 엔을 투자해 함경남도 흥남에 설립한 황산암모늄 비료회사로, 건설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로 알려졌다. 1930년대 전기·화학 공업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으나 6·25 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흔적도 없이 초토화됐다.
이북명의 소설 <질소비료공장>(1932)에 의하면 흥남공장은 종업원 4000명의 대규모 공장이었으나 노동자들은 열악한 작업환경과 낮은 임금에 시달렸다. 작가 이북명 자신도 흥남공장의 노동자 출신이었다.
위원회 신고 내용에 의하면 이들의 사망은 특정 시기에 몰려있다. 41명 전원이 1945년 1월 20일부터 8월 20일 사이에 사망했는데, 특히 5월(12명) 6월(12명) 7월(8명)에 집중돼 있다. 위험한 작업에 노출돼 굶주림과 폭력 속에서 일하면서 재해를 당하거나, 전염병이 퍼졌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정부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위로금 지원은 1938년 4월부터 1945년 8월 15일 사이에 일제에 의해 군인·군무원·노무자 등으로 국외 강제동원된 건에 한정돼 있다. 국내동원의 경우 위로금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어 이들 국내동원 피해자 및 유족 지원이 시급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신상미 기자 sh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