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수형자들이 판 것으로 추정되는 방공호(왼쪽)와 지표면 40㎝ 아래에 드러나는 천인갱의 유골.
위원회가 발간한 <당꼬(탄광의 일본식 발음)라고요?>(2005) 속 고복남(구술 당시 87세) 옹의 증언에 의하면, 22세 때인 1943년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를 거쳐 보름 만에 하이난에 도착했다고 한다. 800명의 조선인 대만인 일본인 간수가 12척의 배에 나눠 타고 출발했는데 중간에 대만인 수형자가 탄 배가 연합군의 어뢰에 맞아 가라앉았다.
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고 옹은 “일은 힘들고 공습은 많고 그랬다. 미군 비행기가 와서 하룻밤에도 8~9번씩 (방공굴로) 나갔다”라며 “배고프니까 다이너마이트도 먹었다. 그게 물렁물렁한데 찰떡처럼 생겼다”고 구술했다.
식량을 실은 보급선이 연합군 폭격으로 가라앉는 등 보급이 끊기자 미나리 소금국으로 버티면서 굶주림을 참지 못한 도망자가 속출했다. 도주하다 붙잡히면 며칠씩 매달아 놓고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고 옹과 함께 사체 묻는 일을 한 조선인 청년이 탈출했는데 그는 중국어가 유창했던 지식청년이었다. 일본이 패전하자 이 청년이 유격대 대장이 되어 중국인들을 데리고 부대로 쳐들어왔다. 고 옹은 “그가 선글라스를 벗더니 내게 악수를 청했다”며 “일인 간수들에게 항복을 받아냈다”고 말했다.
해방 후 2달 만에 섬으로 미군이 들어왔다. 위안부, 광복군과 함께 배를 타고 부산으로 귀국한 고 옹은 미군으로부터 1000원을 지급받아 고향인 평양으로 귀환했다. 비행기 건설공사장에 800여 명의 조선인이 있었지만 부산항에 도착한 생존자는 겨우 50여 명에 불과했다.
신상미 기자 sh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