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강원도 이천수리공사현장에서 현장감독으로 참여했던 마츠오 시게루(맨 오른쪽).
군대식의 엄격한 명령 체계 하에서 간수가 주야로 감시하면서 일을 시켰다. 작업원 사이에서 소란이 일면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100대 때리기’ ‘서로 따귀 때리기’ 등의 형벌을 가했다.
시게루는 또 “관청의 지시로 작업원이 응모했으며 응모하지 않으면 식량 배급을 중단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즉 일단 작업원으로 지목받은 사람은 좋건 싫건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간척지 공사장에 나가서 일해야 했던 것이다.
저자 마츠오 시게루는 나가사키 출신으로 사세보상업전수학교, 경성쇼와공과학교를 졸업했다. 1928년 나카무라구미의 사장인 양부가 인천항만 공사용역을 따내자 18세에 양부를 따라 조선으로 건너왔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끝내고 쌀 증산을 독려하며 농지개량 도로 철도 항만을 한창 건설하던 시기였다. 그는 “조선으로 건너올 때 조선 사람은 사상이 좋지 않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실제로 그런 문제는 없었다. 조선인들과 잘 어울렸다”고 적었다.
시게루는 압록강 청성대교, 고성 적벽교 가설, 경의선 터널, 이천수리시설, 경부선·경의선 복선화 작업 등 대규모 토목공사에 참여해 현장감독으로 일했다.
1945년 그가 안주군 간척지 제3구 공사의 현장감독으로 일하던 때 일본이 패전하고 조선이 해방을 맞았다. 시게루에 의하면 일주일 후인 8월 22일, 조선인 수형자들이 봉기를 일으켜 형무소를 부수고 전원 탈주했다. 조선인 경찰들은 그저 구경하고 있었고 일인 간수들은 숫자가 적어서 제압당했다. 조선인들은 죄수복을 벗어 산처럼 쌓아놓고 가버렸다. 조선 지역 어디서나 “조선 만세의 함성 소리가 들렸고, 일본인들은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9월 초가 되자, 경찰서 보안서에서 일본인은 모두 형무소로 들어가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조선인을 가두기 위해 시게루 자신이 만든 형무소에 갇히게 된 것이다. 안주군 거주 일본인은 모두 400명 남짓으로 “10년 이상 조선에 거주한 지배자들”이었다. 이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비좁은 임시 형무소에 수용됐다. 9월 24일이 되자 소련군이 들어왔다. 시게루는 형무소에서 풀려나 남쪽으로 300㎞를 걸어서 조선을 빠져나왔다.
신상미 기자 sh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