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시침을 2002년 1월14일로 돌려보자. 이날 신승남 당시 검찰총장은 청와대에 사직서를 냈다. 동생 승환씨가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된 데 대한 책임을 진 것이다.
같은 날 열린 연두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윤태식-진승현 게이트’에 청와대 비서진이 연루된 데 대해 “죄송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이 자리에서 ‘개각 시기’에 대한 질문을 받은 김 대통령은 “솔직히 게이트 때문에 매일 정신을 못 차리고 (개각에 대해) 차분히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난 2002년 벽두를 게이트 정국으로 달궜던 사람들은 윤태식, 이용호, 정현준, 진승현, 최규선씨 등 모두 다섯 명.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서울구치소에 함께 수감돼 있다. 이들 중 구치소 내의 근황이 알려진 사람은 최규선, 윤태식, 진승현씨 등 3명. 먼저 최씨는 구치소 내에서도 튀는 행동을 보여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최씨는 지난해 5월4일, 접견 온 변호사의 휴대폰으로 미국에 있는 부인에게 전화를 걸려다 적발됐다. 이틀 뒤에는 탄원서 초안을 만들어 변호사에게 건네려다 또다시 적발되기도 했다. 이 같은 자신의 행동이 언론에 보도되자 같은 달 21일 자신의 변호인인 강호성 변호사를 통해 옥중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정치단체들이 나를 비리의 온상으로 보고 정쟁의 도구로 삼는 행태에 대해 우려를 금치 못한다”는 ‘경고성’ 메시지였다. 최씨의 이 같은 행동은 ‘제2의 폭로를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주위의 예상을 불러모았다. 특히 이회창씨 자금 지원설, 노벨평화상 로비설 등이 불거지면서 그의 ‘입’은 시한폭탄으로 비유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씨의 변호인인 강호성 변호사는 최근 그의 근황을 전하며 “더 이상의 핵폭탄은 없다”고 말했다. 강 변호사에 따르면 최규선씨가 변호인에게 “나는 이회창씨에게 20만달러를 건네지도 않았으며 노벨평화상 로비를 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20만달러 수수설’과 관련해 최씨는 지난해 12월 말부터 다시 검찰의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20만달러 수수설’을 처음 폭로한 설훈 의원은 “2002년 10월경 최규선씨를 면회했는데 ‘(의원님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얘기를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강 변호사는 이 같은 설 의원의 주장에 대해서도 “(최씨가)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저 (의원님) 입장 곤란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례적인 인사였다는 것이다. 또 강 변호사에 따르면 노벨평화상 로비설에 대해서도 최씨는 “김 대통령을 노벨상 위원회에 홍보하는 방법을 알아봐 준 것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최씨가 메가톤급 핵폭탄을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세간의 시선에 대해서도 “핵폭탄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고 강 변호사는 전했다. 그는 “설혹 그런 것이 있다해도 폭로를 할 만큼 (최씨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 정권 초기부터 최씨를 알고 지냈다는 강 변호사는 “최씨는 출소 뒤 사업을 할 계획을 갖고 있으며 옥중에서도 사업 생각뿐”이라고 전했다. 최씨는 지난해 5월 변호사를 통한 성명에서 “미국의 월트디즈니사와 손을 잡고 ‘서울 디즈니랜드’를 만들겠다”는 사업 구상을 공표한 바 있다.
옥중에서 ‘사업 구상’을 하는 게이트 주인공은 한 사람 더 있다. 수지 김 살해 혐의와 사기•뇌물공여죄 등으로 징역 18년을 선고받은 윤태식씨. 역시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인 윤씨는 이미 몇 가지 사업 아이템에 대한 구상을 마치고 특허출원을 준비중이다.
윤씨는 요즘 구치소측의 집필허가를 받아 특허출원서를 작성하고 있다고 한다. 윤씨가 면회를 온 한 측근에게 자신의 사업 아이템을 처음으로 밝힌 것은 지난해 10월. 이 측근에 따르면 윤씨는 인공위성을 이용한 교통통제시스템을 생각했다고 한다.
전국 고속도로와 국도의 교통 상황을 위성으로 한 눈에 파악해 차량의 흐름을 원활하게 조정한다는 것이다. 윤씨는 이 같은 사업구상을 전하면서 “지문 인식 사업은 비교도 안 될 만큼 획기적인 것”이라며 흥분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윤씨가 밝힌 또 하나의 사업 아이템. 다름 아닌 교도소 수감자를 산업인력으로 활용하는 방안이다. 수감자들을 지역의 기업에 투입한 뒤 손목에 특수팔찌를 채워 도주를 방지한다는 것. 칩이 내장된 팔찌는 교도관과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자동으로 손목을 죄기 시작해 거리가 멀어지면 수감자를 기절에까지 이르게 한다고 한다.
윤씨는 이 두 가지 사업 아이템을 접견 대기실 등에서 교도관들을 만날 때마다 ‘설파’하고 있으며 교도소 내에서도 비교적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윤씨의 사업 구상이 교도소 내에서 얘깃거리가 되자 ‘반응’을 보여 온 또 한 명의 ‘게이트 주인공’도 있다.
불법대출•주가조작 등의 혐의로 구속수감된 진승현씨. 지난해 12월 옥중에서 우연히 윤씨와 마주친 진씨는 “윤태식 회장님 아니시냐”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고 한다. 그때까지 윤씨와 진씨는 TV 화면을 통해 서로의 얼굴을 알고 있을 정도의 ‘막연한’ 사이였다고 한다.
이때 진씨는 윤씨에게 “윤 회장님의 사업 아이템 얘기를 들었는데 사업성이 괜찮은 것 같다”면서 “내가 돈이 조금 있는데 투자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다는 것. 하지만 윤씨는 진승현씨의 ‘옥중 투자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면회 온 측근이 “왜 거절했느냐”고 묻자 윤씨는 “그거 별로 돈 드는 거 아닌데 투자까지 받을 것 없다”고 대답했다는 것.
윤씨는 ‘빈 껍데기 회사를 만들어 주가나 부풀리는 사람 아니냐’며 진씨에 대한 인물평을 덧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진승현씨 역시 ‘재기’에 대한 집착이 상당히 큰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윤씨의 사업 구상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풀이되고 있다.
한때 자신의 이름 뒤에 ‘게이트’ ‘리스트’ 등의 꼬리표를 붙인 채 대한민국을 들썩들썩하게 했던 사람들. 그들이 함께 수감돼 있는 서울구치소에는 때아닌 ‘옥중 사업’ 바람이 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