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8일 LG홈쇼핑에 들이닥친 수사관들이 전략기획본부장실서 압수서류를 챙기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불법 대선자금 사건을 수사중인 대검 중수부(부장 안대희 검사장)는 이번 주부터 삼성, LG 등 5대 재벌그룹 총수와 고위급 임원 등을 잇따라 소환해 조사한다. 지난주까지 숨가쁘게 몰아친 해당 기업 계좌 및 사무실 등의 압수수색과 재무담당 실무자 소환조사 등을 거쳐 사실상 경영진 사법처리 수순 밟기에 들어간 것이다.
대검 관계자는 “이번 주에는 기업체들 문제와 관련해 조금 바빠질 것 같다”며 물이 오른 재벌기업 수사에 가일층 박차를 가할 것임을 예고했다.
이에 앞서 안대희 중수부장은 지난 21일 기자 간담회에서 “곧 대선자금 수사 윤곽이 잡힐 것이고, 12월 초부터는 사법처리 수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안 부장은 또 “대기업 수사 범위를 특정할 수는 없겠으나 어느 정도 윤곽은 잡아가고 있다”고 말해, 재벌그룹의 불법 대선자금 제공 혐의를 상당 부분 포착했음을 시사했다.
소환조사가 임박한 거물급 재계 인사들로는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강유식 ㈜LG 대표이사 부회장,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 정순원 현대자동차그룹 기획총괄본부장, 신동인 롯데호텔 사장 등이 꼽힌다.
이 가운데 수사자료 제출 등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가 검찰로부터 집중 포화를 맞고 있는 LG그룹의 구 회장은 그룹 계열사인 LG홈쇼핑을 통해 조성한 비자금을 정치권에 전달한 혐의에 대해 집중 조사를 받을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지난 18일 5대 기업 계열사 중에서는 처음으로 LG홈쇼핑 본사에 대해 전격적인 압수수색을 벌여, LG측이 납품업체와의 거래실적 등을 조작해 수십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단서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 회장과 마찬가지로 출국 금지된 삼성 이학수 구조본부장의 경우, 지난해 대선 당시 그룹 차원에서 조성한 비자금 중 일부를 계열사 대표들 명의로 민주당측에 전달한 의혹 등에 대해 조사를 받게 될 전망이다. 검찰은 안복현 제일모직 사장 등 전·현직 삼성 임원 3명이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에 개인 명의로 낸 3억원의 출처가 개인 돈이 아닌 회사 자금이라는 단서를 포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현대차그룹 정 본부장의 경우 대선 당시 그룹 차원에서 임직원 24명의 명의를 빌려 한나라당에 9억원을 편법 제공한 혐의가 검찰에 포착돼, 이 부분에 대해 집중 조사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노무현 후보 캠프에도 임직원 명의로 6억6천만원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따라서 정몽구 회장 관련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 외에 비슷한 방법으로 정치자금을 제공한 롯데 한화 한진 두산 풍산 등 경영진의 줄소환도 불가피할 듯하다.
검찰은 재계 순위 40위권인 효성그룹과 20위권의 금호그룹, 여기에 더해 지난해 건설도급순위 1백50위급인 서해종합건설의 여의도 본사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이고, 이 회사 김대회 대표를 소환조사했다.
이처럼 당초 ‘5대그룹+알파’ 정도로 예견됐던 검찰의 기업체 수사범위가 1백대 기업군을 넘나들 정도로 확장됨에 따라 앞으로 검찰의 수사망에 걸리는 기업체들이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 때문에 재계는 “검찰 수사로 기업들이 다 죽게 생겼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지만 검찰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안대희 부장은 “경제 문제를 들어 대선자금 수사를 빨리 끝내야 한다는 얘기들이 많다. 하지만 그러든 말든 검찰 수사는 계속된다”고 공언했다.
▲ 김종빈 대검차장(가운데), 안대희 중수부장(왼쪽) 등 검찰 수뇌부. | ||
대검은 그동안 “대선자금 수사가 우선이지만 기업체 계좌 등에서 비자금 단서가 나오면 수사할 수 있다”는 원칙을 수차례 밝힌 바 있으나, 실제 그런 사례가 발생했는지는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 삼성그룹의 경우만 해도 안복현 제일모직 사장 등 전·현직 임원 3명에 대한 검찰의 계좌추적이 어느 선까지 진행되고 있는지 베일에 가려 있다.
그렇다고 검찰이 아예 ‘경제’를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대검 수사팀은 대기업 수사를 본격화한 이후 하루도 빠짐 없이 수사 대상 기업 등의 주가 동향을 면밀히 챙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소식통은 “서울지검 금융조사부가 올 초 SK 분식회계 사건을 수사할 당시 매일 두 차례 SK 그룹 계열사들의 주식시세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며 “지금의 대검 중수부 역시 다를 게 없다”고 전했다.
특히 검찰은 최근 LG카드가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맞은 것이 혹시라도 대선자금 수사 여파인 듯이 세간에 잘못 알려질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관계자는 “LG카드 위기는 수사와 전혀 무관한 것이 확실하고, 대다수 국민들도 그렇게 알고 있으리라 보이지만 왠지 찜찜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안대희 부장은 사석에서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해 혹시 재벌 오너들이 물러날 경우, 국내 자본이 많지 않은 만큼 외국 자본이 몰려와 ‘지배자’로 들어서는 등 재벌의 지배구조가 바뀌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는 하고 있다”고 속깊은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어쨌든 검찰의 대대적인 공세에 당황한 각 그룹들은 모든 역량과 인맥을 동원해 검찰 수사 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를 위해 삼성 LG SK 한화 등 주요 그룹들은 중수부 검사들과 혈연·학연 등이 닿는 임직원이나 정보 수집을 전담하는 사내 비선 조직, 대검 출입기자들과 안면이 있는 홍보실 임직원 등을 검찰 주변에 전진 배치한 상태다. 또 일부 대기업들은 L, Y변호사 등 중수부 출신의 변호사들을 보유한 대형 로펌에 사건 수임을 의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맨’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다 보니 경쟁 기업에 대한 음해성 정보나 미확인 첩보들도 양산되고 있다.
삼성그룹이 검찰에 ‘대외비’를 조건으로 일찌감치 선거자금 내역을 제출했다거나, LG홈쇼핑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 사실이 경쟁사에 의해 언론에 유출됐다는 소문들이 그런 것들이다.
안대희 중수부장은 최근 기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1차 수사시한이자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24일부터 일주일간은 무조건 쉬겠다”고 말했다. 따라서 최소한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재벌기업의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될 전망이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