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출범 후 ‘386 그룹’ 대 ‘부산파’, ‘386그룹’ 대 ‘중진그룹’ 간 격돌에 이어 이번엔 우리당 김원기-정대철-이상수-이해찬 의원 등 중진 온건파와 정동영-천정배-신기남 의원을 축으로 한 재선 강경파가 여권 내 주도권을 놓고 정면충돌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386 그룹의 ‘2선 퇴진’에 공동보조를 펴 핵심인 이광재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낙마시키는 ‘개가’를 올렸던 양측이 우리당 창당(11월11일)을 전후해 총선전략과 여권 내 체제정비 등 주요 현안에 갈등을 보이면서 불협화음이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양측의 이 같은 대립은 ‘중진 대 소장파’의 단순구도가 아니라 노 대통령 핵심 측근그룹들도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심상찮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또 노 대통령이 최근 양측 핵심인사들과 연쇄접촉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여권 내 권력지형 변화 움직임에 관한 ‘노심’(盧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양측의 ‘암투’를 우리당 내로 범위를 좁혀 보면 가장 큰 현안은 17대 총선 지도부,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의 간판인 중앙위 의장으로 누구를, 어떤 방식으로 뽑아 내세울 것인가와 정국 최대 현안인 대선자금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로 모아진다. 여기엔 좀처럼 ‘뜨지 않는’ 우리당의 현실과 ‘적’(한나라당)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해 아군의 희생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먼저 당 지도부 선출을 둘러싼 강·온파간 충돌은, 이 문제를 답보상태인 우리당의 지지도를 끌어올리는 기회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당내 융합의 계기로 활용할 것인가의 차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천 등 내년 총선 때까지 정치일정의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세 대결’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우선 강경파들은 창당 시점을 전후해 실시한 KBS와 SBS, <한겨레> 여론조사에서 10%대 초·중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당의 지지도 제고를 위해서는 지도부 선출과정에서 형식과 내용면에서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핵심인사는 “우리당이 국민들에게 어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사상 유례없이 여당을 스스로 깨고 신당을 만들었지만 기존 정당과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점에 있다”며 “김원기 의장과 이해찬 의원 등 중진들이 창당과정에서부터 흥행이 안 되는 쪽으로 몰고가더니 이제는 당 대표를 간선으로 뽑자는 등의 시대착오적 주장을 내놓기에 이르렀다”고 겨냥했다.
이 인사는 “기득권을 버린다는 것이 창당의 대전제인 만큼 중진들도 대의원들의 선택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며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높은 만큼 경선을 통해 중진들 대신 새로운 얼굴들이 당의 지도자로 나서면 지지도는 자연스레 올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겉으로는 기층까지 참여하는 자유경선을 내세우지만, 내용적으로는 사실상의 ‘중진 2선 후퇴론’에 가깝다 하겠다.
그러나 온건파 중진들은 이 같은 주장을 당권을 목표로 하는 강경파들이 내세우는 ‘겉치레 명분’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특히 직선 당 대표에 강한 의지를 두고 있는 정동영 의원이 대표적인 강경파인 천정배 신기남 의원, 노 대통령 핵심측근인 이강철 상임중앙위원 등과 손잡고 본격적인 당 주도권 장악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온건파들은 그러나 최근 김원기 의장이 노 대통령과 독대(17일)한 이후 돌연 휴가를 떠나고 그 배경과 관련, “노 대통령이 김 의장에게 ‘2선 후퇴’를 요청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정대철 이상수 의원 등이 검찰에 소환되는 등 어려움에 빠지자 긴장하고 있는 분위기다.
▲ 여권이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있다. 정동영 의원(왼쪽)의 재선강경파와 김원기 의장의 중진온건파는 주요 현안을 놓고 불협화음을 보이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대선자금 해법을 둘러싼 양측간 알력도 권력투쟁의 주요 고리다. 특히 강경파들이 대선자금 공개 약속이 이달 들어서만 네 차례나 연기된 데 대해 이 문제와 연관이 깊은 온건파 중진들을 거세게 몰아붙이면서 앙금이 깊어져 가고 있다.
실제 대선 당시 대선자금 마련에 핵심역할을 했던 한 중진은 최근 비공개 당 회의에서 대선자금과 관련한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음에도 한 강경파 의원이 “(얘기한 것이) 모두 다 위법 아니냐”며 성토하자 회의장을 박차고 나와 “누가 위법인지 모르느냐. 그러는 저 X은 대선 때 돈 한 푼 모금해 온 적 있느냐”며 울분을 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온건파들은 검찰이 대선 당시 노무현 캠프의 대선자금에 대한 전방위 수사를 벌이면서 자금 모금에 핵심역할을 했던 정대철 이상수 의원 등 중진들의 입지가 어려워지고 있음에도 강경파들이 이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정치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로 비판하고 있다.
반면 강경파들은 ‘대선자금 문제로 당이 더 이상 타격을 받지 않으려면 위법사실이 있는 중진들의 사법처리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원칙론으로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우리당 내 강·온파들이 이처럼 다툼을 벌이게 된 데는 여권 내 기존 파워그룹이었던 386그룹과 청와대 문재인 민정수석-이호철 민정 2비서관을 축으로 한 부산인맥이 주춤거리는 것과 연관이 깊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386의 경우 이광재 전 국정상황실장의 사퇴에 이어 다른 핵심인사들도 연말 개편 때 청와대를 나올 것이 확실한 상황이고, 문 수석과 이 비서관도 최근 대통령 측근 비리와 관련해 야당의 공세가 집중돼 행동반경이 축소되면서 당내 인사들 간의 권력투쟁이 가열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강·온파들은 청와대 개편방향에 대해서도 당권과 패키지로 묶어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노 대통령의 선택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온건파 내에서는 당 대표를 김원기 의장 등 중진이 맡을 경우 비슷한 성향의 ‘기획통’인 이해찬 의원이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아 당내 융합과 청와대의 정치력 제고를 도모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반면 강경파들은 경선을 통해 ‘세대교체형 대표’로 정동영 의원이 선출될 경우, 청와대 비서실장도 그동안 대내외적으로 정치개혁 작업에 깊숙이 참여해 온 천정배 의원이 적임자라는 입장이어서 대조를 보이고 있다. 당사자인 이-천 의원은 이 같은 내부 움직임에 대해 “현실성이 없다”며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강·온파간 갈등과 대립이 향후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양상은 크게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 여권 내의 시각이다. 양측간 권력투쟁이 그만큼 간단치 않다는 반증이라 하겠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