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 중의 한 장면.
그러던 어느 날 B 씨가 A 씨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게 된다. B 씨는 “5년 전에 이혼한 아내가 브로커의 말을 듣고 대출을 받아 인천 등지에 빌라 2채를 구입했는데 재개발이 되지 않아 손해를 보게 생겼다”고 토로했다. B 씨는 특히 “브로커들이 서류를 부풀려 은행으로부터 ‘과다 대출’을 받았다며 이것 때문에 손해 본 이자만도 한두 푼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A 씨에게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지 넌지시 물어보기 시작했다.
B 씨의 말을 들은 A 씨는 해결방법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경찰서 경제범죄팀 소속으로 근무하고 있던 A 씨는 곧바로 ‘업무상배임’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은행 직원들이 실수로 과다 대출을 한 것으로 몰아가고 이를 압박하면 직원들로부터 ‘합의금’을 받아낼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A 씨는 B 씨의 부탁을 승낙하고 “나만 믿으라”며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이때부터 범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지난 1월 말 B 씨는 여경 A 씨의 지시 하에 가짜 주소로 기재한 진정서를 작성해 A 씨에게 건넸다. A 씨는 이것을 갖고 있다가 경찰서 민원실에 넣지 않고 바로 형사사법정보시스템(KICS)에 무단 접속해 입력을 하기 시작한다. 민원이 접수되자 A 씨는 담당 팀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사건을 자신에게 배당하기에 이르렀다. 허위 민원서와 ‘셀프 사건 배당’이 연결된 대담한 범행이 시작된 셈이다.
2013년 3월쯤 A 씨는 해당 은행을 직접 찾아가서 조사를 펼치게 된다. A 씨는 은행을 나서기 전 자신만의 ‘수사팀’을 꾸렸다고 한다. 은행에서 근무하다 퇴직해 대출 업무를 잘 알고 있는 지인 C 씨와 내연남 B 씨와 함께 은행을 찾아간 것이다. 이때 C 씨는 ‘금융담당 수사관’으로 B 씨는 ‘중앙일간지’ 기자로 감쪽같이 탈바꿈했다. 은행 직원들에게 압박을 넣기 위한 전략을 쓴 셈이다.
오전 11시쯤 대출 담당 여직원 두 명을 만나 곧바로 2층 사무실로 직행한 가짜 수사팀은 직원들을 취조하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특히 A 씨는 “대출 현장심사 등 감정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고 대출을 해준 것은 업무상 배임 혐의가 인정되는 사안이다”라며 직원들에게 겁을 줬다. 직원들이 “대출은 적법하게 이뤄졌다”고 부인해도 소용없었다. A 씨가 강하게 밀어붙이자 B 씨 역시 이를 거들었다. 중앙일간지 기자를 자처한 B 씨는 “이 정도 사건이면 언론에 나간다. 사실대로 말해라. 그러면 기사를 쓰지 않겠다. 진정인과 합의하는 게 가장 빠르다”라고 은밀하게 제안하기도 했다. B 씨는 수사 과정을 휴대폰으로 일일이 녹취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취재’를 방불케 하는 모습을 보였다.
A 씨가 근무하는 경찰서로 자리를 옮긴 수사는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오전 11시에 시작해 ‘18시간’가량의 마라톤 수사를 이어간 것이다. 은행 여직원 중 한 명은 장시간 수사에 지쳐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 다음에 조사를 받으면 안 되겠느냐”며 호소했지만 A 씨는 이를 거부하고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은행 사무실로 다시 출석하라”고 지시했다. 여직원은 집으로 돌아가 오전 10시경 다시 은행으로 나왔지만 곧 화장실에서 구토 증세를 보이며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기에 이른다.
여직원은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A 씨는 아랑곳없었다. A 씨는 병원에 있는 여직원에게 “쇼하지 말라”라고 전화 통화를 하며 출석을 또 다시 강요했고, 오후 4시쯤 여직원이 출석하자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수사를 진행하는 강행군을 이어갔다. 하지만 무리한 수사인 것을 방증하듯 결국 혐의점은 찾아내지 못한 채 합의는 끝내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A 씨와 B 씨가 합작한 조작 수사 사건은 이대로 묻히는 듯 보였지만 엉뚱한 곳에서 두 사람의 범행은 발각되게 된다. 조작 수사를 벌인 비슷한 시기에 두 사람이 보도방 업주들을 상대로 돈을 뜯어낸 혐의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2013년 3월경 A 씨는 B 씨를 데리고 보도방 업주를 단속하는데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서울 구로구의 한 공원으로 접대 여성을 부른 B 씨는 보도차량이 도착하자 A 씨와 함께 ‘보도방 현장 단속 중’이라며 보도방 업주에게 수갑을 채워 차로 끌고 들어갔다. 이후 “풀어줄 테니 증거품을 내놔라”라며 돈 200만 원을 갈취해간 것으로 전해진다. 호흡이 척척 맞은 두 사람은 이후에도 구로구 일대를 돌아다니며 보도방 업주에게 돈을 뜯어내다가 첩보를 접한 경찰에게 지난 5월 10일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추가 혐의를 찾아내던 검찰이 두 사람의 ‘조작 수사’ 혐의도 포착해내게 된 것이다.
지난 1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17단독 이상호 판사는 공동공갈과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여경 A 씨에게 징역 1년 6월을, 기자인 B 씨에게는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이 판사는 판결 이유에 대해 “A 씨는 공익을 수호해야 하는 경찰관의 의무를 외면하고 수사를 빙자해 금전적 이익을 얻었으며, B 씨도 경찰 행세로 범행에 적극 가담한 죄질이 무겁다”고 밝혔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