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와 3년간 교제를 했던 20대 남성 B 씨는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여자친구와 추억으로 남긴 성관계 동영상이 휴대폰을 분실한 이후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B 씨는 자신과 여자친구의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발견할 때마다 해당 사이트에 삭제요청을 했지만 동영상은 ‘연예인 ○○을 닮은’에서 ‘연예인 △△을 닮은’으로 미묘하게 이름이 바뀌면서 계속 퍼져나갔다. B 씨와 여자친구의 생활은 엉망이 됐고 누군가 알아볼까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
과거 화려한 밤 문화를 즐겼던 전력이나 재혼경력이 있는 예비 신랑·신부, 얼굴 성형을 끝내고 이름까지 개명한 연예인 지망생, 대기업 면접을 앞둔 취업준비생. 이들은 ‘잊혀질 권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산타크루즈캐스팅컴퍼니(산타크루즈)를 찾는 단골 고객들이다. 고등학교 시절 재미로 썼던 유치한 ‘팬픽(팬(fan)과 픽션(fiction)의 합성어로, 특정 연예인의 팬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소설)’을 남자친구가 볼까 걱정된다며 삭제를 요청하는 20대 여성에서부터 연말 감사를 앞둔 공기업까지 ‘잊혀질 권리’ 서비스를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모델 에이전시였던 산타크루즈의 ‘잊혀질 권리’ 서비스는 한 아역 모델의 악플을 삭제하는 작업에서 시작됐다. 현재는 과거 디지털 기록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사람부터 사망한 사람의 디지털 기록, 악성댓글이나 루머에 시달리는 연예인, 기업의 온라인 평판까지 관리하고 있다.
산타크루즈의 ‘잊혀질 권리’ 서비스는 의뢰인에게 위임장을 건네받으면서 시작된다. 의뢰인은 4명으로 이루어진 팀이 관리하게 된다. 김호진 산타크루즈 대표는 “의뢰인의 의뢰에 따라 산타크루즈 자체 프로그램에 검색어를 입력하면 어렸을 적 실수한 흔적들부터 사진, 동영상, 기사, 댓글까지 검색이 된다”며 “데이터 수집이 끝나면 부정적인 검색어에 걸린 게시물들을 포털이나 해당 사이트에 삭제 요청 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삭제 작업은 일주일간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이후 1년 간 의뢰인의 부정적인 디지털 기록은 산타크루즈가 관리한다.
일정시간 후 자동 삭제되는 미국 모바일 메신저 ‘스냅챗’.
김호진 대표는 “미성년자의 경우 어렸을 적 실수로 평생을 포기하는 일도 있다. 실제로 의뢰인 중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며 “청소년들의 용돈을 사업비로 받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마음이 편한 것이 우선이고, 새로운 희망을 가져보라고 청소년은 무료로 했다”고 말했다. 이어 김 대표는 “무엇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위험한 사진이나 동영상은 처음부터 촬영하지 말고 휴대전화는 해킹이나 분실의 위험이 있으니 저장에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잊혀질 권리’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최근 이를 위한 새로운 기술도 활발하게 발명되고 있다. 사진이나 메시지 등의 정보에 타이머를 부착해 일정 시간 후 자동 삭제되는 기술을 2011년 미국 ‘스냅챗’이 선보이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바 있다. 페이스북은 ‘포크(Poke)’를 통해 전송 메시지의 시간을 설정할 수 있는 서비스를 출시했고, 국내 벤처기업 브라이니클은 모바일 메신저 ‘돈톡’을 통해 ‘펑 메시지’ 기능을 선보였다. 펑 메시지 기능은 이용자가 1초, 3초, 5초, 7초, 9초, 10초의 시간을 설정해두고 지정한 시간만큼만 대화내용이 노출된 후 자동 삭제되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이경아 씨(41)도 이 같은 기술을 발명했다. 사용자가 글을 쓰거나 사진을 올릴 때 사전에 타이머로 만료 시점을 정해놓으면 해당 데이터의 만료 기한에 자동적으로 소멸하는 ‘디지털 소멸 시스템(Digital Aging System, DAS)’을 개발한 것. 이 씨는 “제자가 초등학생 당시 철없이 올린 인터넷 게시물이 지워지지 않아 중학생이 되어서도 상처를 받는 모습을 보고 DAS를 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이 씨가 개발한 DAS는 국내에 설립된 디지털에이징연구소를 통해 특허작업과 사업화가 진행 중이다.
이 씨는 “(‘잊혀질 권리’를 위한 신기술은) 개인에게는 프라이버시를 보호해 주고, 서비스 사업자에게는 불필요한 데이터로 인한 비용 지출을 절감해 줄 것”이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검색을 통해 세상 곳곳으로 재 전파 되는 게시물, 댓글, 리트윗 등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