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억대의 예산을 쏟아 붓는 자치단체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일 년 내내 이어지는 지방 축제마다 기네스 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홍보가 필수품처럼 돼가고 있다. 대행사가 요구하는 돈만 입금하면 모든 과정을 알아서 진행해주는 데다 ‘기네스 기록’이라는 생색까지 낼 수 있어 수요가 넘쳐나는 지경이다. 이런 열풍에 힘입어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기네스 세계기록은 물론이고 국내 기록 등재에도 목을 매달고 있는 실정인데 문제는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 생겨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괴산 가마솥 - 등재 가능성 확인 없이 5억 들여 제작…“호주에 더 큰 질그릇 있다” 허탈
이런 효과를 기대하고 전국 지방자치단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기네스 도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우리 지역에 ‘세상 가장 큰’ ‘단 하나뿐인’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몰이와 이름 알리기에 충분한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네스 도전에 대한 성공을 동기부여삼아 사람들의 참여도 쉽게 이끌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지자체 입장에서도 기네스북 등재 행사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성공유무를 떠나 이미 기네스북 도전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홍보효과를 거둘 수 있으며 무엇보다 ‘손이 덜 가는’ 사업인 것. 전국에서 경쟁적으로 치러지고 있는 각종 아가씨 선발대회나 퍼포먼스 행사, 스포츠 대회 등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지만 기네스북 도전은 그렇지 않다. 예산책정만 되면 대행사가 기획에서부터 아이디어 제공, 홍보, 등재까지 일사천리로 해결해주는 덕분이다.
하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 먼저 예산낭비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일단 기네스북에 오르기까지 엄청난 예산이 소요된다. 기네스북 등재가 가능한지 여부를 알아보는 것부터 돈이 드는데 전화로 즉시 확답을 받기 위해서는 약 80만 원의 비용이 든다.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로 확인하는 방법도 있으나 언제 답변을 받지 몰라 행사 일정에 쫓기는 지자체 입장에서는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2005년 충북 괴산군은 이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고 대형 가마솥을 설치했다 황당한 일을 겪기도 했다. 매년 열리는 고추축제 홍보를 위해 무려 5억 6000만 원의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둘레 17.85m, 지름 5.68m, 높이 2.2m, 무게 43.5t 규모의 대형 가마솥을 만들었지만 이미 호주에 이보다 더 큰 질그릇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돼 기네스북 등재를 포기한 것. 사전조사도 없이 무턱대고 만든 가마솥 또한 워낙 크기가 커 지금껏 단 한 번도 밥이나 죽을 지을 수 없어 옥수수와 감자만 6차례 쪄내고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양구 해시계 - 등재 대행비로 업체측에 1억 지출, 실제 든 비용은 겨우 1천만원…법정 비화
등재 여부 확인 뒤에도 모든 과정은 돈으로 이뤄진다. 영국 본사 심판관 초청료만도 약 800여 만 원에 달하며 비즈니스 좌석 이상의 왕복 항공료와 5성급 호텔 숙박비까지 제공해야 한다. 만약 모든 요건을 갖춰 심판관으로부터 합격 판정을 받아도 기록을 등재하고 기네스 로고를 사용하는 데 수백만 원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기네스북에 오른 울산 울주군의 초대형 옹기도 기네스북 등재를 위해 수천만 원의 비용을 사용했다. 높이 2.2m, 둘레 5.2m, 무게 172㎏의 옹기를 만들기 위해 다섯 번이나 실패를 거듭한 탓에 제작비만 2000만 원이 소요됐으며 국내 대행사에게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직접 기네스 등재를 하는 과정에서 이중으로 예산을 지출하는 어이없는 일도 발생했다.
기네스북의 인기를 등에 업고 생겨난 대행사들의 횡포도 문제다. 현재 국내에서는 한 유명 업체가 도맡다시피 전국 지자체의 기네스북 등재 업무를 대행하고 있다. 본래 본사와 협약을 맺고 기네스북 등재를 대행해오던 한국기네스협회가 있었으나 지난 2001년 인증서 남발로 계약이 철회돼 해산되자 등장한 곳이다.
국내의 독특한 기록을 모으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A 업체는 일정 금액을 받고 기네스 세계기록 등재 업무까지 손을 뻗쳤다. 그런데 대행 업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었던 탓에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는 일이 많았고 과도한 금액까지 받아 챙기다 김 아무개 원장이 결국 경찰에 적발되기까지 했다.
경찰 조사 결과 김 원장은 기네스 본사의 인터넷 홈페이지 회원으로 가입해 아이디를 부여받은 것 외엔 어떠한 관계나 권한도 없었으나 그저 명성만 이용해 2009년 1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전국 지자체와 기업 등을 대상으로 ‘세계 최고기록’을 만들어냈다. 지자체들에게 기네스 본사와 협력관계인 것처럼 접근해 등록비용을 최대 20배까지 부풀려 받아 챙기다 지난 6월 법원으로부터 벌금 1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울주 옹기 - 관광객 유치 목적 제작 옹기엑스포 235억 쓰고 23억 수익…감사원 감사
양구군 외에도 김 원장은 부산 롯데백화점 광복점으로부터 ‘세계 최대 실내영상 음악분수’의 기네스 등재비용으로 9830만 원을, 부산 사하구청으로부터 ‘다대포해수욕장 바닥분수’의 기네스 등재비용으로 3290만 원을, 울산시 울주군청으로부터 ‘세계 최대 옹기’ 기네스 등재비용으로 9405만 원을 받아 챙겼다.
또한 A 업체는 기네스 로고 사용료를 받을 권리가 없는 일개 대행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지자체 및 기업으로부터 5700여만 원에 이르는 돈을 받아 챙긴 사실도 드러났다. 세계에서 가장 큰 우체통으로 등록됐었던 광주 광산구 역시 A 업체의 말만 믿고 로고 사용료로 250만 원을 지불했다.
이처럼 대행사를 통한 기네스북 등재에 여러 잡음이 일고 있지만 여전히 A 업체와 지자체 모두 별반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다. A 업체 관계자는 “굳이 우리를 통해 기네스 등재를 신청하지 않아도 된다. 개인적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피해를 입은 지자체들도 “어쨌든 지나간 일이고 기네스북에 올랐으니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될 게 없다’는 지자체들의 해명은 실상과 달랐다. 기네스 기록에 도전한 지자체들은 하나같이 이를 통해 인지도 향상 및 지속적인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내걸었으나 현실에선 거의 효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울산 울주군의 초대형 옹기는 기존의 기네스 기록 분야에 없던 것이라 급히 기준을 정해 등재를 시키는 등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돼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관광객 유치에도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초대형 옹기를 선보인 옹기엑스포는 애초 예산인 99억 원의 배가 넘는 235억 원을 쓰고도 수익은 목표치 124억 원의 절반도 채 미치지 못하는 23억 원에 그쳐 감사원으로부터 부실 운영 진단을 받기도 했다. 강원 양구의 해시계 역시 주변경관과 어울리지 못한 채 오가는 사람들에겐 그저 ‘큰 조형물’ 취급만 받을 뿐이라 돈 값 못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무분별한 ‘기록 만들기’ 실태에 대해 시민들은 물론이고 각종 시민단체까지 “전시·탁상행정의 표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지자체들이 세계기록뿐만 아니라 국내기록에도 집착하는 행태를 보이면서 전형적인 세금낭비라는 비판도 거세지고 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소 40마리 잡은 북, 5만kg짜리 큰 줄도…
기록 세우기 열풍이 불면서 기네스 월드 레코드를 벤치마킹한 여러 기네스가 생겨났다. 국내를 기준으로 기네스 인정을 해주는 한국기록원을 필두로 각 지자체에서도 ‘부산 기네스’ ‘송파 기네스’ ‘고양 별별 기네스 올림픽’ 등의 행사를 통해 기록 세우기에 열중하는 모습이다. 덕분에 온갖 황당한 기네스 기록이 쏟아지고 있다.
기네스 기록의 단골손님인 ‘초대형’을 만족시키기 위해 집채만 한 북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무게만 5만㎏이 넘는 큰 줄까지 등장했다. 충북 영동의 초대형 북 ‘천고’는 소나무 원목 15t 트럭 4대, 소 40여 마리 분의 가죽을투입해 만들어진 북으로 세계 최대의 크기를 자랑한다.
경남 무형문화재 제20호인 의령 큰 줄도 길이 251m, 직경 2.2m, 무게 5만 4500㎏에 달해 앞서 세계기록 보유자였던 일본을 가볍게 제치고 일인자가 됐다.
음식에도 대형화 바람이 불긴 마찬가지다. 지난 9월 대구 수성구에서 만들어진 1030m에 달하는 대형 김밥은 국내에서 가장 긴 김밥으로 한국기록원에 등재됐으며 전북 김제시에서 쌀 홍보를 위해 절편으로 만든 345.825㎡의 떡 모자이크도 국내 기록을 갖게 됐다.
이뿐만 아니라 강원 강릉시의 정동진역은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기차역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으며 국내 기록으로는 막걸리 500㏄ 스푼으로 떠먹고 매운 고추 5개 빨리 먹기, 10인11각 오리발 신고 30m 빨리 걷기, 얼굴에 빨래집게 많이 집기, 가장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동시에 맥주 건배하기 등 황당한 분야들도 수두룩하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