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다저스 류현진의 통역이자 다저스 국제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는 마틴 김이 <빛을 그리는 그림자>(휴먼큐브 발행)란 책을 출간했다.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정복기 및 류현진과 마틴 김이 함께 했던 99가지 이야기들이 생생한 사진과 함께 흥미롭게 정리돼 있다. 지난 한 시즌 동안 메이저리그 신인 류현진의 입과 귀를 맡아 선수와 동고동락했던 마틴 김의 특별한 경험담이 진솔하고 담백하게 다가온다. 책 출간을 맞아 지난 18일 5일간의 일정으로 귀국한 마틴 김은 19일 워커힐호텔에서 기자와 만나 책 출간과 관련된 뒷얘기를 전했다. 그 자리에는 그의 ‘빛’으로 활약 중인 류현진도 함께했다.
LA 다저스 류현진의 통역이자 다저스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는 마틴 김이 <빛을 그리는 그림자>란 책을 출간했다. 최준필 기자 choijp@ilyo.co.kf
# 류현진은 마틴 김 도우미
류현진이 한참 동안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한마디 던진다. “형! 이거 정말 멋진데? 대박 날 것 같아!” 옆에 앉아 있던 마틴 김, “진짜? 이건 내가 쓴 게 아니야. 현진이, 너랑 같이 쓴 거나 마찬가지야. 네가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이런 책을 쓸 생각이나 했겠니. 현진아! 고맙다.”
보기만 해도 훈훈한 ‘형제애’를 주고받는 류현진과 마틴 김. 처음에는 다저스 직원과 선수로 만난 그들이지만, 한 시즌이 지난 지금에는 비즈니스적인 면보다는 ‘패밀리’의 개념이 더 부각되고 있는 게 역력했다. 지난 10월 29일 귀국 후 개별 인터뷰는 일절 사양했던 류현진이 마틴 김 인터뷰에 동행한 걸 보면, 류현진이 마틴 김에 대해 어느 정도의 고마움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류현진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마틴 형’을 위해 직접 커피까지 공수했다. 마틴 김의 책에 자신의 사인도 함께 담아 선물하는 등 마틴 김 돕기에 적극 나섰다.
“현진이가 책을 내는 데 오케이하지 않았다면 이 책은 나올 수가 없었어요. 시즌 중반에 책 얘기를 꺼내니까 쿨 하게 받아들이더라고요. 잘 써보라고 하면서. 현진이가 데뷔 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기 때문에 책으로까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제 책이 아니에요. 현진이가 주인공이라면 전 조연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마틴 김은 책의 내용에 대해 류현진과 자주 상의했다고 말한다. 류현진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류현진의 이해와 동의가 필요했던 탓이다.
# 기자들은 알 수 없는 라커룸 분위기
“사실 다저스 선수들과 관련된 내용에는 밝히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선수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모든 걸 공개할 수 없었지만, 최대한 솔직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미디어에 공개되는 클럽하우스와 미디어가 퇴장한 후 라커룸의 분위기가 다를 때가 많아요. 그 안에서 벌어지는 특별하면서도 재미난 이야기들이 책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
메이저리그는 경기 전후로 미디어에 한해 클럽하우스를 오픈한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면 기자들은 모두 퇴장해야 하는데, 마틴 김은 기자들이 보지 못하는 라커룸 분위기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제가 한국어를 하긴 해도, 책을 쓰는 것처럼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여러 군데서 막힐 때가 많아요. 만약 영어로 책을 썼더라면 훨씬 더 소소한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었을 텐데, 한국어로 표현하려다보니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런 점이 조금 아쉽긴 합니다.”
류현진의 절친이었던 루이스 크루즈는 날씬한 체격의 마틴 김과 덩치 큰 류현진을 빗대 애니메이션 <라이언킹>에 등장하는 티몬과 품바라는 별명을 붙여줬다고 한다. 최준필 기자 choijp@ilyo.co.kf
# 다저스 내의 ‘티몬과 품바’
마틴 김은 류현진과 자신을 향해 라이언킹에 나오는 티몬과 품바를 빗댄 루이스 크루즈 얘기를 꺼냈다. 루이스 크루즈는 류현진이 다저스 입단 후 가장 먼저 손을 내밀고 다가왔던 류현진의 절친. 그러나 지난 7월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 됐다가 11월 일본 프로야구 지바롯데 마린스로 팀을 옮겼다.
“루이스가 저랑 현진이를 볼 때마다 ‘하쿠나마타타’라고 불렀어요. 당시엔 루이스가 왜 그런 주문을 외우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루이스는 저와 현진이를 보면서 ‘라이언킹’에 나오는 ‘티몬’과 ‘품바’를 연상했었나 봐요. 그래서 거기서 나오는 ‘하쿠나마타타’를 외친 것이더라고요. 루이스 얘기를 듣고 우린 서로를 쳐다보면서 ‘빵’ 터졌어요. 정말 비슷해 보였거든요. 품바는 체격이 좋고 말수도 적지만 씩 웃으면서 장난기 많은 캐릭터(흑멧돼지)이고, 티몬은 마르고 일자 몸매(미어캣)의 이미지이잖아요. 루이스 얘기를 듣던 아드리안 곤잘레스까지 가세해서 티몬과 품바 닮았다며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루이스가 팀을 나가면서 우리의 티몬과 품바란 별명도 사라졌어요. 루이스 이후에는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죠.”
# “밥값은 내가, 후식은 형이!”
마틴 김은 책에 류현진과 밥값과 후식 값을 분담했던 일화를 설명했다. 원정경기를 다니면서 함께 식사할 일이 많아지자, 연봉이 많은 류현진이 밥값을 내기로 하고, 자신은 커피 등 후식을 담당했다는 내용이다.
“한국은 나이 많은 사람이 밥값을 계산하는 게 일반화돼 있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현진이랑 밥을 먹을 때마다 제가 내려고 했는데, 횟수가 잦아지면서 점차 부담이 되더라고요. 제 생각을 읽었는지, 현진이가 먼저 얘길 꺼냈습니다. 앞으로 식사할 때 밥값은 자신이 낼 테니, 커피나 디저트는 형이 계산하라고. 겉으론 ‘그래도 돼?’ 했지만, 속으론 기뻤어요. 부담을 덜었다는 생각에. 그런데 밥 먹으러 한식당을 찾으면 많은 분들이 밥값을 계산 못하게 하세요. 현진이 응원 차원에서 공짜로 대접하겠다면서. 덕분에 저도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 류현진과 다툰 적 있다?
서로 다른 문화에서 살았던 남자들이 함께 생활하다보면 종종 의견 충돌이 빚어지기도 한다. 류현진은 한국에서, 마틴 김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줄곧 미국에서 생활해온 터라 문화적인 차이에서 오는 소소한 다툼이 있었을 듯 했다.
“서로 싸운 적은 없어요. 나이 차이가 많다 보니 서로 얼굴 붉히며 싸우는 게 불가능했죠. 대신 서로한테 짜증을 낸 적은 있었어요.”
마틴 김의 얘기를 듣고 있던 류현진이 이런 말을 곁들인다. “원정 경기 가서 식사하러 나가자고 하면, 형은 ‘현진아 졸려, 좀 더 있다가’라고 말하곤 움직이질 않아요. 난 배가 고픈데, 형은 안 나가려 하고. 그럴 때 살짝 짜증을 낸 적은 있었어요.”
마틴 김도 가만 있을 리 없다.
“처음엔 사인하는 문제로 인상을 쓴 적이 있어요. 저한테 사인 좀 받아달라는 부탁이 엄청났거든요. 그 부탁을 다 들어주진 못했는데, 하루는 다저스 구단주가 절 불러서 현진이 사인 좀 받아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현진이한테 공을 건네며 사인을 해달라고 했더니 짜증을 내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현진이는 매일 같이 쏟아지는 사인볼 요청에 부담을 갖고 있었더라고요. 그래서 그 후론 부탁받은 공을 갖고 있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사인을 요청했어요.”
류현진이 마틴 김의 말에 설명을 보탰다. “형! 그래도 형이 해달라고 한 건 하나도 안 빼고 다 (사인)해줬잖아.”
# 추신수를 ‘추형’으로 부르게 된 사연
마틴 김은 추신수의 열혈 팬이다. 추신수와 친분을 맺기 오래 전부터 선수 추신수를 좋아했다고 고백한다. 그런 그가 직접 추신수와 대화를 나누고 식사도 하는 관계로 발전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추신수 선수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있을 때 우연히 뉴스를 통해 그가 어떤 선수인지를 알게 됐어요. 뉴스에서는 추신수 선수를 향해 가장 먼저 경기장에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선수라고 묘사를 했더라고요.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지는 선수가 한두 명이 아닌데, 추신수 선수는 그런 과정을 다 겪고 이겨낸 후 메이저리그에서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잖아요. 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친하게 지내는 형 중에 보라스 코퍼레이션에서 에이전트 일을 맡고 있는 테드 여란 분이 계세요. 그 형이 추신수 선수와 친해서 같이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가슴이 떨려서 식사를 제대로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틴 김은 류현진과 함께 다니면서 가슴 떨려했던 ‘그 선수’와 재회하게 된다.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서의 만남을 시작으로 신시내티 레즈가 LA로 원정 경기를 왔을 때, 그리고 다저스가 신시내티로 원정 경기를 갔을 때 추신수를 식사 자리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던 것.
“추신수 선수가 저보다 나이가 어려요. 그래도 계속 존대어를 했더니 추 선수가 자신을 편하게 불러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하지만 제 입장에선 ‘감히’ 추 선수에게 ‘야’ ‘자’ 라고 부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생각해 낸 호칭이 ‘추형’이었습니다. 비록 나이는 어려도 마인드만큼은 어른스럽고 의젓한 추신수 선수가 저한테는 ‘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제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전 연락이 왔더라고요. 제 사인을 담아서 집으로 보내달라고. 고마울 따름이죠.”
류현진이 또 거든다. “마틴 형이 신수 형 진짜 좋아해요. 아마 나보다 신수 형을 더 좋아할 걸요?”
# 한국 프로야구팀의 러브콜
류현진의 통역이자 마케팅에서도 남다른 수완을 발휘한 마틴 김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면서 마틴 김은 한국 프로야구팀으로부터 러브콜까지 받게 된다.
“어느 날 한국에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팀 명은 밝힐 수 없는데, 한국의 프로야구팀 관계자였습니다. 메이저리그 마케팅 운영을 배우고 싶은데, 한국으로 와서 같이 일을 할 수 없겠느냐는 내용이었죠. 제가 다저스 직원이고, 현진이를 돕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한국으로 갈 수 있겠어요. 말씀은 고맙지만,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죠. 현진이가 잘나가니까 제 주가도 덩달아 오른 것 같아요. 이 모든 게 현진이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들이죠.”
# 메이저리그 스타도 사람이다
적게는 수십 억 원에서 많게는 수백 억 원의 몸값을 자랑하는 메이저리그 선수들. 다저스 직원인 마틴 김도 처음엔 그들의 생활이 일반인과 크게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선수들과 구단 직원은 친하게 못 지내요. 비즈니스적인 관점에서 대하기 때문에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거든요. 저도 그랬고요. 그렇다보니 선수들의 생활에 대해 잘 몰라요. 클럽하우스 안으로 들어갈 일도 거의 없는 편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저도 일반 팬들과 비슷한 입장이었을 겁니다. 선수들한테 쉽게 다가기 어렵고, 말 거는 것도 조심스럽고, 어색하고 뭐 등등의 감정인 거죠. 그런데 막상 그들과 함께 생활해보니 고액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라고 해도 사는 건 일반인과 다를 게 없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돈이 많다고 걱정과 고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부유함이 행복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었던 것이죠. 그런 깨달음의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현진이의 통역으로 일하면서.”
최준필 기자 choijp@ilyo.co.kf
# 책의 수익금은 전액 기부
마틴 김은 책을 준비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고민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한 시즌 현진이 통역을 맡아 일해 놓고선 돈 벌려고 책을 낸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걱정이 끊이질 않았어요. 그래서 책을 통해 발생되는 수익금 전액은 현진이의 자선재단인 ‘HJ99파운데이션’에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현진이 재단에서 인천에 유소년 야구장 건립을 진행하고 있잖아요. 거기에 수익금 전액이 쓰이길 바라는 마음에 흔쾌히 응했습니다.”
마틴 김은 어렸을 때 한국에서 야구를 한 경험이 있다. 그때 흙먼지 뒤집어쓰며 뛰어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미국의 야구 문화에선 상상조차 못하는 그림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마틴 김은 류현진 재단에서 진행하는 유소년 야구장 건립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하면서 자신의 노력들이 작은 보탬이 되길 바랐다.
마틴 김의 인터뷰를 듣고 있던 류현진이 책에 실린 마틴 김의 사진을 보면서, “형을 가리켜 축구선수 외질 선수 닮았다고 하기에 일부러 인터넷을 찾아봤어요. 외질 선수의 실제 얼굴을 확인하려고. 진짜 똑같던데요? 많이 닮아서 깜짝 놀랐어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틴 김을 쓰러지게 만든 한 마디를 잊지 않는다. “그래도 형! ‘판다’, ‘다크서클’ 보다는 외질 닮았다는 소리가 더 낫지 않아?”
# 내년에도 류현진 통역 맡을까
마틴 김은 인터뷰 말미에 조심스럽게 내년 시즌에도 류현진의 통역을 맡게 되는지 여부에 대해 솔직한 생각을 내비쳤다.
“지금 구단에서는 저를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어요. 사장까지 나서서 마케팅 업무에 전념하라고 얘기했으니까요. 그러나 현진이가 ‘절대 안돼’를 외치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꼭 저와 함께 가겠다는 거죠. 영어 때문만은 절대 아니에요. 현진이도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을 정도는 됐으니까요. 혼자 지내는 게 싫어서인 것 같아요. 현진이에게 저는 진짜 형이거든요. 그 형을 놓고 싶지 않은 거죠. 오죽했으면 스캇 보라스가 구단에 전화까지 했겠어요. 내년에도 제가 통역을 맡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전했다고 들었어요. 지금으로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류현진은 고민에 빠진 마틴 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21일(토)에 있을 마틴 김의 책 사인회(서울 영등포 교보문고, 오후 5시 30분)에까지 동행, 마틴 김과 함께 사인회를 열며 자신의 간절함을 드러낼 예정이다. 이런 류현진에 대해 고마움이 한가득이지만 구단 직원인 마틴 김으로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크지 않다는 게 어려운 숙제로 다가온다.
<빛을 그리는 그림자> 뒷 표지에는 선수들의 추천사가 담겨 있다. 그중에서 추신수가 쓴 추천사가 눈에 띈다.
‘만약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누군가 마틴 형을 소개시켜줬더라면 나는 메이저리그에 훨씬 빨리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마틴 형 같은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진이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멋진 두 사람이 함께 한 이 책을 야구팬 모두에게 추천한다.’
한편 1월 초 출국을 앞두고 있는 류현진은 최근 건강검진을 받고 웨이트트레이닝을 실시하면서 본격적인 몸 만들기에 돌입했다. 행사와 시상식 참여 등으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 그는 하루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속내를 내비친다.
류현진은 자신의 절친인 후안 유리베가 다저스와 재계약을 맺은 데 대해서 “정말 기다렸던 소식”이라면서 크게 흡족해 했다. 마틴 김 또한 “유리베는 선수들의 정신적인 지주이다. 그 선수가 없는 선수단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라면서 “무엇보다 현진이가 믿고 따르는 선수라 현진이가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