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전 대통령은 불과 39세에 부림사건의 피해자인 장상훈 씨의 결혼식 첫 주례를 맡았다. 위는 장 씨 결혼 피로연. 사진출처=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도 부림사건으로 인해 법정에서 처음 노 전 대통령을 만난 인물이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 전 수석은 노 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각종 선거를 치르기까지 숨은 조력자로 나섰다. 초선의원이던 노 전 대통령의 보좌관을 맡았으며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청와대 민정비서관, 제도개선비서관, 국정상황실장, 민정수석도 역임했다.
노 전 대통령과 함께 변호인단으로 나섰던 사람들 대부분은 여전히 법조계에 몸을 담고 있다. 인권변호사로 명성을 떨치던 이흥록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 지명 국가인권위원을 지냈으며 현재까지도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변호사가 거의 없는 지역에서 무료로 변론을 해주는 등 지금도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검찰의 압박으로 부림사건을 직접적으로 맡진 못했으나 뒤에서 모든 것을 지원해줬던 김광일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정치에 입문해 같은 길을 걷는 듯 보였다. 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계에 진출한 김 변호사는 문민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는 등 정치권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동행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3당 야합’을 두고 노 전 대통령이 자신과 다른 노선을 택하자 결별을 선언한 것. 이후 그는 2002년 대선 당시 노 전 대통령을 비방하는 성명을 내 충격을 줬으며 2004년 노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되자 이를 공개적으로 환영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는 2010년 5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부림사건을 담당했던 검사들의 삶은 어땠을까. 부산지검 공안부 수석검사로 사건을 진두지휘했던 최병국 검사는 부림사건 이후에도 굵직한 사건을 연달아 맡으며 이름을 떨쳤다. 문민정부에 발생한 한보사태도 그의 손을 거쳐 갔으며 대검 공안부장 및 중수부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9년 대전고검 차장으로 재직할 당시 ‘이종기 변호사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결국 옷을 벗어야만 했다.
하지만 최 검사는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이듬해 한나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된 최 검사는 내리 3선 의원을 지내며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다만 최 검사는 지금까지도 부림사건이 거론될 때마다 “당시의 결정은 소신 있게 처리한 것이며 관대한 처분이 내려졌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최 검사와 함께 부림사건을 담당했던 고영주 검사는 1980~1990년대를 대표하는 공안검사로 이름을 남겼다. 삼민투위사건, 민중교육사건, 한총련사건 등 대표적인 공안사건들을 도맡아 처리했던 고 검사는 대검 감찰부장, 대검 공안기획관, 서울 남부지검장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2005년 스스로 사표를 내고 돌연 변호사 개업을 선언했다. 자신이 검사 승진 명단에 포함되지 못하자 내린 결정이었는데 이를 두고 고 검사는 “노 전 대통령의 복수”라고 말했다. 그 역시 현재까지도 변호인들을 포함해 “부림사건에 관련한 모든 사람들을 공산주의”라 주장하고 있으며 ‘국가정상화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검사 3인방’ 중 한 명인 장창호 검사는 앞서 두 사람에 비해 비교적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 또한 공안검사로 여러 지검에서 활약했으나 1997년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검사로서의 삶을 끝냈다. 한때 연세대 법학과 겸임교수로 지냈던 장 검사는 현재는 법무법인 세광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부림사건의 주임판사에 속했던 당시 부산지법 서석구 판사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1심을 담당했던 서 판사는 3차로 구속된 이호철 전 수석 등에게 국가보안법에 관련해 무죄를 선고했다 전주로 좌천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서 판사는 사표를 제출하고 대구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시민운동에 뛰어들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서 판사는 과거 시민운동 경력을 참회하며 현재 종편에 단골 패널로 등장, 보수성향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